그의 고등학교 동창회에서는 직장이나 사는 집을 중심으로 소모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얼마 전 직장을 새로 옮긴 그는, 당연히 새로운 소모임에 참석하려고 그 모임을 주관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대로 농담을 늘어놓고 있는데 반응이 좀 이상했다. 어딘지 마지못해 상대해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방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나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우린 네가 모임에 나오지 않길 바란다. 너처럼 말 잘하고 잘난 사람이 끼면 모임 분위기가 깨진다는 게 중론이다.” 친구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어어? 하며 손에 든 전화기를 노려보던 그가 일갈했다. “자식들, 내가 박학다식한 게 그렇게 비위가 상하냐?”
그의 말대로 그는 과연 아는 게 많았다. 말을 잘한다는 것도 자랑거리의 하나였다. 어떤 주제가 주어져도 그걸 1분에 말하라면 1분 안에, 1시간으로 늘리라면 늘릴 자신이 있다는 게 자랑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뭐, 내가 끼면 분위기가 깨진다고? 그래, 고만고만한 것들끼리 모여 어디 잘해 봐라.” 중얼거려 보지만 마음은 상처 난 부위에 생짜로 소금을 뿌리듯 쓰라렸다.
그는 비로소 뭐가 잘못됐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는 우선 말이 너무 많았다. 사람들을 만나면 자기가 아는 것들을 얘기하느라 남의 말을 들을 시간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상대방이 한두 마디 하려고 하면 “아, 그 얘기? 그건 그런 게 아니라 사실은 말야…”하고 치고 드는 데는 선수였다.
그러면서 자신을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척척 알려주는 박학다식한 수재쯤으로 착각했다. 문제는 그가 아는 정보가 사실은 다른 사람들도 대개는 다 아는 얘기라는 거였다. 단지 그에게는 그걸 수많은 인용 부호로 요란하게 포장하는 재주가 있을 뿐이었다.
이런 타입은 언뜻 1회적인 인기는 누릴 수 있을지 몰라도 깊이 있는 인간관계는 기대하기 힘들다.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박학다식한 이야기꾼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자신의 내면의 이야기, 정말 살아 있는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에게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것이다.
양창순(신경정신과 전문의)www. mind―op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