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명품에 그 신사]'할리 데이비슨'을 타는 사람들

  • 입력 2001년 6월 4일 18시 36분


“퉁 퉁 퉁 투그둥둥….”

3일 오전 서울 광진구 어린이대공원 앞 광나룻길. 일요일을 맞아 교외로 나들이 가는 차량들 가운데 2열 종대로 가지런히 줄을 맞춘 할리 데이비슨 15대가 눈에 들어왔다.

이상한 엔진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갑자기 3대의 레이서용 오토바이가 끼어들었다. 차들 사이로 급회전을 하다가 급기야는 할리 데이비슨 행렬로 들어와 헤집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핸들 조작을 잘못했다가는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급박한 상황.

그러나 할리 데이비슨 대열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마치 ‘치기 어린 장난’을 너그럽게 봐준다는 듯 대열 앞에 선 검은 선글라스의 사나이는 간단한 수신호로 대열의 속도를 늦추었다. ‘무반응’에 심심해졌는지 레이서용 오토바이들은 굉음을 내며 시야 바깥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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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F감독 박준원씨 인터뷰

“명품 오토바이의 ‘대명사’인 할리 데이비슨을 타면서 그 정도 ‘품위’를 유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우리야말로 ‘오토바이계의 신사’ 아닙니까.”

검은 선글라스의 주인공 고태식씨(47·수중촬영가)가 수신호를 바꾸자 대열은 조금씩 속도를 올리며 경기 가평군 유명산 국립공원 쪽으로 이어지는 아차성길로 접어들었다.

◇한대값 2500만원 안팎

▽우리는 할리맨〓할리 데이비슨 애호가들의 범세계적 기구는 ‘호그(HOG·Harley Owners Group)’. 50개국 55만명 정도가 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호그 한국지부에 속해 있는 사람은 400명 정도. 주로 대기업 임원, 의사, 변호사, 사진작가 등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토바이의 가격이 2500만원 안팎이어서 웬만한 월급쟁이들은 ‘호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범한 샐러리맨이나 대학생들도 푼돈을 아껴가며 2∼3년씩 장기 저축을 해 최저가 모델인 ‘스포스터 883’(1050만원)을 마련해 대열의 말미에 합류하는 ‘눈물겨운’ 사연도 있다.

할리맨은 크게 ‘외장파’와 ‘실속파’로 나뉜다. 외장파는 오토바이를 사자마자 각종 액세서리를 동원해 화려하게 꾸미는 데 치중하고, 실속파는 엔진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튜닝을 거듭한다. 두 가지를 적절히 해낼 수 있다면 원숙한 ‘할리맨’이 됐다는 증거.

할리맨 자체도 ‘튜닝’ 대상이다. 여름에는 청바지에 검은색 티셔츠, 겨울에는 검은색 가죽옷을 즐겨 입는다. 매연과 자외선으로부터 건강을 지키기 위해 얼굴을 가리는 복면도 빼놓을 수 없는 패션 소품. 이도 저도 없으면 구레나룻과 콧수염만으로도 개성을 살린다.

운행 중에“오빠! 태워줘”라는 소리를 들어도 절대로 태워주지 않는다. ‘할리걸’ 복장을 갖추지 않으면 뒤에 태운다 해도 ‘폼’이 나지 않기 때문. 뒷자리는 대체로 할리맨들의 부인이나 연인이 차지한다.

◇규율엄해 욕설 음주운전땐 제명

▽할리맨의 매너〓‘괴상한’ 옷차림에 화통을 집어삼킨 듯한 오토바이 소리 때문에 ‘폭주족’이라는 누명을 듣기도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내부적으로는 회원들에게 엄격한 규칙과 매너를 지키도록 요구한다.

교통법규와 신호를 지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운행 중 침을 뱉거나 담배를 피울 수도 없다. 욕설을 하거나 음주운전을 하면 엄중문책에 제명까지 각오해야 한다.

가장 특이한 점은 교통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2열 종대의 지그재그 행렬. 연륜과 통솔력을 갖춘 할리맨이 ‘로드 캡틴’이 되어 행렬을 이끈다. 행렬 이탈은 곧 질서를 파괴하고 사고 위험성을 높이는 행위. 이때 엄중한 주의를 주는 것은 안전관(세이프티 오피서)의 몫이다.

특히 자동차 사이로는 운행하지 않는다. 운전자에게 위협감을 줄 뿐만 아니라 시야가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로 들어설 가능성이 높아 사고의 위험이 높기 때문. 이런 내규를 어기는 사람을 할리맨들은 ‘양아치’라고 부른다.

◇연말 불우아동 찾아 봉사

▽자유를 찾아서〓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춘천 홍천 양평 강화도 등은 할리맨들이 즐겨 이용하는 단골 투어링 코스. 특히 강원 둔내는 매년 1차례씩 전국의 할리맨들이 참가해 랠리를 펼치는 장소로 인기가 높다.

또 연말이면 산타할아버지 차림을 하고 서울 시내 불우 아동과 무의탁 노인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벌이는 ‘산타 투어링’에도 참가자가 늘고 있다.

“특유의 엔진소리, 온몸으로 느끼는 진동, 코끝을 스치는 휘발유 냄새, 그리고 자연…. 이 모든 게 할리의 매력이죠.”

이날 투어링을 진두지휘한 고태식씨는“일주일에 한 번씩 투어링을 하면서 자유를 만끽하고 나면 몸에 붙어 있던 스트레스가 오토바이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간다”며 환하게 웃었다.

<차지완기자>marudu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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