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내 초중고교에 설치된 ‘영어 전용 구역(잉글리시 존)’에 영어가 없다. 잉글리시 존은 학생들이 자주 영어를 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영어 구사력을 높이기 위해 영어만 사용할 수 있도록 정한 구역.
‘새 물결 운동’을 벌이고 있는 서울시교육청이 올해부터 이를 적극 권장해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영어교과실이나 교무실, 복도, 매점 등을 잉글리시 존으로 지정했다.
교육청 감사를 앞두고 서둘러 매점을 잉글리시 존으로 만든 서울 종로구 C중학교. ‘스낵 바(Snack Bar)’라는 간판이 입구에 걸린 매점 내부 곳곳에는 이 곳에서 써봄직한 영어회화 몇 구절이 게시판에 붙어 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오자 학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판매대 앞에 길게 줄을 선 학생들 중 영어를 하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우리말로 잡담하며 장난치는 데 정신이 없던 2학년 권모군(15)은 “매점 안에서는 영어를 쓰라며 벽에 게시판만 만들어놨을 뿐 지도하는 선생님도, 실제로 영어를 쓰는 친구들도 거의 없다”고 말했다. 매점 판매원은 “처음엔 ‘원 빵, 투 밀크’라고 브로컨 잉글리시(broken english)를 사용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요즘엔 이마저 없다”고 했다.
계단 3, 4층을 잉글리시 존으로 만든 강남구 D중학교도 사정은 비슷하다. 깜찍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어만화가 붙어있어 영어유치원을 연상케 할 만큼 아기자기하게 꾸며졌지만 학생들 몫인 영어게시판에는 ‘퍽 유’(Fuck you) 등 민망한 영어 욕설만 잔뜩 적혀 있었다.
학생 홍모군(14)은 “별로 갈 일도 없는 옥상 아래 계단에 잉글리시 존을 만든 것부터 잘못”이라며 “지나가다 눈길을 주는 학생들이 가끔 있을 뿐 모여서 영어로 대화하기에는 여건이 안 된다”고 말했다.
이 학교 최모 교사(46)도 “자율적으로 공간을 활용하라고 맡기다보니 학생들이 호기심에 한번 들러보는 정도에 그쳐 ‘전시용’으로만 쓰이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서울 강남교육청 관내 38개 중학교 가운데 잉글리시 존이 설치된 곳은 33개교. 따로 영어교과실이 있는 곳은 8곳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이처럼 복도와 매점, 식당 등을 잉글리시 존으로 활용하고 있다.
잉글리시 존으로 지정된 강남 C중학교 매점은 학생들의 발길이 점차 뜸해지면서 매출이 크게 줄어드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다.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새 물결 운동의 하나로 각 학교의 실정에 맞게 운영하도록 ‘권장’했을 뿐”이라면서 “학교측이 관리를 소홀히 해 졸속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차츰 정착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교사들은 “변변한 어학실도 없는 학교에서 복도나 매점에 잉글리시 존을 억지로 만든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면서 비현실적인 ‘탁상 교육정책’을 꼬집었다.
<박윤철·김현진기자>yc9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