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秋時代 宋의 襄公은 참으로 讓步心이 많았던 제후였다. 아버지 桓公(환공)이 죽자 庶兄(서형)인 目夷(목이)가 자신보다 賢明하다는 이유로 王位조차 讓步했을 정도다. 目夷 역시 讓步心이 대단했다.
‘자고로 나라를 讓步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최대의 仁者입니다.’
襄公은 그를 宰相으로 삼아 宋을 다스리게 된다. 在位 7년 째 되던 어느 날, 隕石(운석)이 5개나 떨어지자 襄公은 覇業(패업)의 상징이라고 제멋대로 해석하고는 이웃 나라들을 마구 치기 시작했다. 目夷의 반대에도 막무가내였다. 그의 행동을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당시 최강국 楚(초)나라였다. 본 때를 보여주기 위해 벼르고 있다가 襄公을 사로잡은 다음 풀어주었다. 警告(경고)였다. 그러자 目夷가 말했다.
‘나라의 화는 이제부터다. 임금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듬해 봄, 鄭(정)이 楚와 연합하자 화가 치민 襄公은 鄭나라를 공격했다. 그러자 楚가 鄭을 도우러 왔다. 楚의 군대가 泓水(홍수)를 건널 때 目夷가 諫言(간언)했다.
‘적은 많고 우리는 적습니다. 지금이야말로 絶好(절호)의 찬스입니다. 빨리 치도록 합시다.’
그러나 襄公의 대답은 의외였다. ‘君子는 相對方의 弱點(약점)을 노리는 것이 아니오.’
이윽고 楚의 군사가 渡江(도강)을 완료했다. 目夷가 재차 재촉했지만 襄公은 君子然(군자연)하며 이번에도 듣지 않았다.
‘천만의 말씀, 적은 아직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않았소. 君子가 어찌 상대방의 弱點을…’
결국 襄公은 일부러 지체하면서 상대방이 陣容(진용)을 다 갖춘 다음에야 비로소 공격명령을 내렸다. 물론 결과는 뻔했다. 宋軍은 大敗하였으며 襄公 자신도 상처를 입고 악화되어 결국 죽고 말았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어리석음을 빗대어 ‘宋襄之仁’이라고 불렀다. ‘宋의 襄公이 보였던 인자함’이라는 뜻으로 ‘쓸데없는 寬容(관용)’을 뜻한다.
鄭 錫 元(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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