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스피드 세상에서 ‘느림의 문화’가 의외로 공감대를 얻어가고 있다. 종래에 명상 참선 단전호흡 등 주로 정신수련 영역에서 강조되어온 느림의 문화가 요즘에는 식생활 취미활동 출판 광고 등 일상생활 곳곳에 파급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2∼3년 사이에 불기 시작한 ‘느림의 문화’는 디지털로 대표되는 속도와 변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소비량이 급증하고 있는 포도주는 느림의 문화를 대표하는 음식. 국내 포도주 업계는 99년 60% 가량 증가한 포도주 판매량이 앞으로도 매년 20%씩 꾸준히 늘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철도청장을 끝으로 공직을 떠난 후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안에 ‘보르도 와인 아카데미’를 연 최훈(崔燻·64)씨는“폭탄주나 ‘원샷 술마시기’가 빠르고 거칠게 돌아가는 한국사회를 상징한다면 향기와 색깔 맛을 천천히 음미하며 즐기는 포도주는 여유와 느림을 상징하는 술”이라고 말했다.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슬로 푸드(slow food)’ 운동도 우리나라에서 서서히 발판을 넓혀가고 있다. 86년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현재 전세계 45개국에 6만5000여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는 이 운동은 맥도날드 햄버거로 대표되는 ‘패스트푸드’ 문화에 반기를 들고 여유로운 식사의 즐거움과 전통음식 보존 등의 기치를 내걸고 있다.
국내 슬로 푸드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김종덕(金鐘德·49)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김치 장류 젓갈 등 길게는 몇 달씩 발효시켜 먹는 음식들이 한국의 대표적인 슬로 푸드”라며 “이 운동은 자연친화적인 식생활을 통해 여유로운 삶을 회복하자는 사회운동”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강연회와 시식회 등을 통해 슬로 푸드를 널리 알리고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전국적인 슬로 푸드 운동 조직을 추진 중이다.
걷기 자전거타기 십자수놓기처럼 시간적 여유를 갖고 즐기는 취미활동도 인기다. 자전거 전문잡지인 ‘바이크 매거진’의 김희주(金熙珠·40) 발행인은 “자전거 판매대수는 매년 15% 가량씩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자전거타기를 즐기는 40∼60대의 중장년층이 크게 늘고 있다”고 소개했다.
아메리칸 니들링협회 최유창(崔裕昌·44) 회장은 “십자수 퀼트 등을 즐기는 사람들이 2∼3년 전부터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며 “십자수 등은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길게는 4∼5개월이 걸리지만 사람들이 시간을 들여 작품을 만드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느리게 사는 삶’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은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가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느림의 미덕을 역설한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상소가 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지난해 발간된 지 2주 만에 비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1위로 뛰어올랐고 작년 내내 1, 2위를 유지했다. 이 책의 출간을 전후로 ‘느리게 사는 즐거움’ ‘느림의 지혜’ ‘느리게 사는 사람들’과 같은 유사한 주제를 가진 책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사회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포착한다는 광고에서도 느림과 여유를 개념으로 한 광고가 부쩍 늘고 있다. 중산층 이상을 겨냥한 S아파트의 TV 광고는 ‘느리게 살자’는 문구로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현기득기자>rati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