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민선교로 유명한 김진홍 목사의 두레공동체 운동이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또 김목사는 18일로 회갑을 맞았다. 두레공동체는 김 목사의 회갑에 즈음해 30주년을 기념하는 조촐한 행사를 가졌다.
20일 서울 역삼동 두레선교회 사무실에서 만난 김 목사는 “30세에 서울 청계천 판자촌에서 시작한 운동이 용케도 30년을 버텼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 목사는 1971년 청계천 활빈교회를 창립하고 넝마주이 전도사로 빈민선교를 시작했다. 74년 유신정권 반대 시위로 수감됐다 13개월만에 출옥한 뒤 79년 청계천 판자촌 철거로 갈 곳을 잃은 50가구를 이끌고 경기 화성의 남양만 간척지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그는 이스라엘의 키부츠처럼 신앙 생활 산업의 삼위일체를 이뤄 함께 잘 살아보자는 ‘두레마을’을 시작했다.
공동체 운동은 지금 ‘두레선교회’ ‘두레농장’ ‘두레장학재단’ ‘두레자연고등학교’ 등의 다양한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 목사가 82년 펴낸 에세이집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93쇄를 찍을 정도로 아직도 인기를 끌고 있다.
그동안의 활발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김 목사는 “30년간은 준비만 했다고 생각한다”며 “환갑의 나이에 이제부터 제대로 시작한다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신라 고려 1000년의 세월은 불교의 시대였고 조선 500년은 유학의 시대였다. 통일한국 1000년은 기독교가 이끌 것이다. 멀리 100년 1000년을 내다보고 바둑의 포석을 깔 듯이 터를 닦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가 중국 옌볜 등에 거대한 농장을 짓고, 장학재단을 통해 인재들을 미국 하바드대학 등에 유학시키고, 두레자연고교라는 대안학교 운동을 벌이는 것은 장기적인 포석에 해당한다. 목사인 그는 뜻밖에도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로 원효를 첫손가락에 꼽았다.
“원효는 귀족불교를 민중불교로, 소승불교를 대승불교로 바꿨다.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지 100년만에 원효가 나타났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지도 100년이 지났다. 기독교에 원효와 같은 인물이 있는가.”
김목사는 원하는 것은 역사의 현장에서 물러나 신학교 안으로,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 갇혀버린 소승적 기독교가 아니라 민족을 구원하고 백성의 삶을 변화시킬 대승적 기독교이다.
그는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죠를 좋아한다. 간죠에게는 하나님 사랑과 겨레 사랑을 하나로 묶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간죠가 자기 집에서 시작한 성서공부반에서는 일본 도쿄대 총장 세명과 수상 한사람이 나왔다. 간죠는 죽을 때 묘비에 이렇게 새겨달라고 말했다.‘나는 일본을 위한 나이고, 일본은 세계를 위한 일본이고,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한 세계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김진홍 하면 아직도 빈민가 넝마주이 청년의 구역다툼을 말리고, 두레마을 콩나물 공장을 분주히 오가는 모습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의 활동은 이제 이런 제한된 영역에 머물지 않고 있다. 97년 경기 구리시에 두레교회를 세운 김 목사는 지방에서 중앙으로, 국내에서 해외로 활동무대를 넓혀가고 있다.
<송평인기자>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