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약자의 감정일까? 슬픔을 느끼는 데도 힘이 필요하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슬픔이 강자의 감정이란 말일까?
노다 마사아키의 ‘전쟁과 인간’(서혜영 옮김·길)은 ‘슬픔을 느끼는 힘’에 대한 책이다. 저자는 2차대전 당시 중국전선에서의 남경학살이나 731부대의 중국인 및 조선인 생체실험 등에 동원된 평범한 일본군 병사들의 전후 역사에서,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 있는 군국주의의 망령을 찾아냈다.
국가의 명령에 의해 전쟁범죄에 동원된 평범한 일본군 병사들은 물론 자신들의 행위를 반성한다. 그런데 이들의 반성은 자주 설명적이고 분석적이다. 자신의 범죄행위에 대한 반성적 분석은 있지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진실로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트라우마(깊은 정신적 충격)를 겪은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심한 정신적 외상과 그에 따르는 정신병적 증후군을 앓은 참전용사들이 별로 없다는 데서 그것은 잘 입증된다. 유대인 학살에 참가한 독일의 평범한 참전용사들의 경우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이들의 반성이 타인을 의식하여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차원에서나 개인적 차원에서 양심적 가책이 동반되지 않은 반성은 형식적이고 제도적인 반성일 뿐이다. 그 반성의 제도와 형식을 강제하는 역사적 조건이 소멸되면, 반성 또한 설 땅을 잃는다. 그러므로 독일에서 다시 네오 나치가 등장하고 신우익의 물결이 일본 사회를 덮쳤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끊임없이 공격성을 강화하고 그것을 합리화하는 사회에서 마음에 상처받을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는 것은 극히 어렵다. 그것은 감성적인 여성이나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어린아이에게나 있을 수 있는 유약한 것으로 간단히 차치된다.
이성과 용기를 두루 갖춘 진정한 사내에게 그것은 감정의 사치일 뿐이다. 엄하고 단호하며 권위적인 가부장의 이미지 혹은 대담하고 박력 있고 의지가 굳은 군사화된 남성성의 이미지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슬픔은 약자 혹은 여성의 전유물이다.
그러나 실은 슬픔에 대한 감수성을 잃은 이 사람들이야말로 형편없이 비겁한 약자들이다. 이들은 국가라는 명령권자가 행사한 거대한 폭력의 외투 밑에 자신의 책임을 은폐하고 도망간다. 이들에게는 주위의 시선에 상관없이 스스로에 대해 고통스러워하고 슬픔을 느끼는 힘이 없다. 이런 사람들이 지배적인 사회는 손쉽게 폭력의 포로가 된다.
강한 인간보다 느끼는 인간이 많은 사회가 참으로 ‘강한’ 사회다.
임지현(한양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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