귄터 그라스는 '양철북' '넙치' '무당개구리의 울음' 등으로 알려진 세계적인 작가. 하지만 그가 소설가인 동시에 미술가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1959년 처녀작 '양철북'으로 화려하게 세계 문단에 데뷔하기 전에 미술가로 활동했다. 독일 뒤셀도르프예술대 등 두 군데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양철북'으로 유명해진 뒤에도 집필활동과 함게 동판화 작업을 해오고 있다.
특히 귄터 그라스의 판화가 소설 못지 않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문학과 미술의 장르를 넘나들고 아우르는 독특한 상상력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에게 '미술은 소설의 시각화이고, 소설은 미술의 문학화'라 정리할 수 있다.
이번 전시품 중 '넙치' 연작화는 이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석기시대부터 지금까지 남녀간의 전쟁에 대한 장편 우화인 '넙치'(1977년)를 기획할 때부터 그린 스케치와 동판화 작품들이다. 그는 넙치 그림을 그리면서 소설을 구상했고, 소설을 쓸 때도 별도로 수 십점의 넙치 동판화를 만들었다. 성기와 칼이 많이 등장해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에로틱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작품들은 독일 미술계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넙치' 뿐만 아니라 그의 미술 작업은 대개 자신의 소설과 연계되어 있다. '고양이와 쥐'(1977년)를 쓸 때는 쥐 연작을, '무당개구리 울음'(1992년)을 집필할 때는 개구리 연작을 내는 식이다. '나의 세기'(1999년)에서는 매 장마다 각 연도를 대표하는 삽화를 그려서 책에 싣기도 했다.
'넙치'를 번역하고 있는 고려대 독문과 김재혁 교수는 "귄터 그라스의 소설에서는 정치 비판적인 메시지를 이야기로 표현하는데 있어서 그림이나 조각에서 볼 수 있던 조형적 구성이 중요한 요소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