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한자표준화 '제자리'…10년째 합의점 도출 실패

  • 입력 2001년 7월 3일 18시 40분


6회 한자문화권내 생활한자문제 국제토론회
6회 한자문화권내 생활한자문제 국제토론회
한국 중국 일본의 학자들이 공통 상용한자 제정을 위해 10년째 협의를 계속하고 있지만 각국의 특수한 사정 때문에 가시적인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1991년 한 중 일의 공통 상용한자 제정을 위해 결성된 국제한자진흥협의회는 지난달 27∼29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제6회 한자문화권내 생활한자문제 국제토론회’를 가졌다. 그러나 이번 토론회에서도 과거 토론회와 마찬가지로 각국의 학자들이 자국의 상황과 입장에 대한 의견을 발표했을 뿐 합의점을 도출하지는 못했다.

이에 따라 이미 3국에 각기 다른 형태의 자형(字形·글자의 모양)이 정착된 상황에서 이를 하나로 통합하는 시도가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지에 대해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문맹 퇴치를 위해 1955년 한자 간소화방안이 제기된 이래 글자의 모양을 단순화한 간체자(簡體字)가 이미 확고하게 정착됐다. 일본도 획을 줄인 약자가 보편화된 반면 한국에서는 정자(正字)에 해당하는 번체자(繁體字)를 사용한다.

고려대 한문학과 김언종 교수는 “한자는 각국의 언어생활 속에서 다른 형태로 정착된 지 오래”라며 “통일 상용한자가 제정된다 하더라도 수많은 불편과 피해를 감수하며 이를 기꺼이 따를 국가가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공통 상용한자 제정의 또 하나의 걸림돌은 상용한자 개념에 대한 세 나라의 입장 차이가 크다는 점이다. 한자의 종주국인 중국을 차치하더라도 일본의 경우 어휘 대부분을 한자로 표기하지만 한국은 의미가 모호할 경우에만 한자를 병기한다. 한국에서는 ‘교육용 한자 1800자’를 선정, 교육하고 있으나 ‘일상에서 늘 사용한다’는 순수한 의미의 상용한자(常用漢字)는 지정돼 있지 않다.

국립국어연구원 이준석 연구원은 “상용한자의 개념도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통 상용한자를 제정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국가의 언어정책과 연관된 한자 표준화가 민간단체 주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 역시 한자표준화 논의의 태생적 한계를 드러낸다. 국제한자진흥협의회는 1991년 발족한 이래 국제토론회를 6차례 개최했으나 올해 토론회에서야 한자 표준화 움직임에 대해 비협조적인 자세를 보여왔던 중국의 ‘우호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전문가들은 정보화 시대에 한자 자형 차이에서 오는 불편은 인간이 아닌 컴퓨터가 해결해야 할 몫이라고 주장한다. 서울대 중문학과 심경호 교수는 “한글 워드 프로세서 프로그램에는 이미 간체자와 정자를 전환하는 기능이 내장돼 있다”면서 “한국어와 영어의 자동 번역도 가능한 시점에서 간체자, 번체자, 약자 전환 기술의 개발을 왜 기대할 수 없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상용한자 통일의 기본적인 취지에 대해 찬동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고려대 국문학과 김흥규 교수는 “한 중 일은 역사적으로 문화자본을 공유하며 한자는 상호 정보교류에 대단히 유용한 자산”이라며 “한자표준화 작업은 자형을 달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비효율적인 측면을 최소화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한 중 일의 공통 상용한자 제정 및 자형 통일 논의는 정부 차원의 지원과 합의가 없으면 상당기간 학자들간의 논의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김수경기자>sk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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