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건영 연세대 유럽어문학부 교수가 최근 펴낸 ‘블라지미르 나보꼬프’(건국대학교 출판부)는 나보코프에 대한 대한 흥미로운 작가론을 담고 있다. 작품 분석 위주의 일반적인 작가 평전과 달리 ‘작가와 언어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작가의 새로운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청년기를 보낸 나보코프는 유럽(1919∼1939년)으로 망명했을 때는 모국어인 러시아어로 소설과 희곡을 발표했다. 이어 미국(1940∼1960년)으로 이민을 간 뒤에는 하버드대학 비교동물학 박물관에서 나비와 나방을 연구하면서 영어로 작품을 냈다.
1958년 영어로 발표한 대표작 ‘롤리타’의 모티브는 1939년 러시아어로 쓴 단편 ‘매혹자’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이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자 나보코프는 직접 ‘롤리타’를 모국어로 ‘재창작’해서 1967년 러시아판 ‘롤리따’를 펴냈다.
영문학과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최 교수는 ‘롤리타’가 갖는 중요성을 “모국어와 외국어, 창작과 번역의 경계를 넘어서 다언어 작가가 될 수 있도록 도왔던 결정체”라고 규정한다.
‘롤리타’를 쓸 당시 나보코프는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지 못했다는 것. 이 때문에 영국식 영어도 미국식 영어도 아닌 ‘나보코프식 영어’라는 새로운 문체를 낳았다는 설명이다.
최 교수는 또 영어 작가로서 ‘나보코프’와, 러시아어 작가로서 ‘나보꼬프’를 구별해야 하듯, 영어판 ‘롤리타’와 이를 새롭게 러시아어로 창작한 ‘롤리따’를 별개의 작품이라고 봐야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최 교수가 이처럼 과감한(?) 헌사를 바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책 머리말에서 “작가의 언어가 그 작가의 소속을 결정한다는 이른바 ‘언어 귀속주의’를 지지한다”고 밝히고 있다. 카프카는 독일문학에, 콘라드는 영문학에 속하며, 아무리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더라도 재일작가 김석범(대표작 ‘화산도’)은 일본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 교수가 보기에 다국어를 구사하며 새로운 언어실험의 지평을 열었던 나보코프는 ‘언어 귀속주의’의 ‘유일한’ 예외자다. 나보코프를 ‘러시아 문학사와 영미 문학사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고고한 언어의 치외법권자’라고 추겨세운 것은 이런 충정의 발로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