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학생은 선생보다 잘 가르쳐 ‘교수’ 소릴 듣기도 하고, 어떤 학생은 말도 안되는 소리만 해대 “너 선생 맞아?”라는 핀잔을 듣는다. 아이들은 또 아이들대로 평소 하지 못했던 짓궂은 질문, 그러나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하고도 기초적인 질문들을 해댄다.
“작가는 왜 하고 많은 동네 중 ‘성북동’이라고 했나요. ‘가리봉동 비둘기’ 하면 안되나요?”, “봉평서 제일 가는 미인이 대체 뭐가 모자라서 못생긴 허생원에게 몸을 허락한 거죠?” 등등.
한 녀석이 있었다. 엉뚱하기로 소문난. 놈의 차례가 되자 내심 불안했다. 놈은 역시 하나도 준비를 해오지 않았다. 그런데 뭘 믿고 그러는지 너무도 당당하게 저벅저벅 교단 위로 올라간다. 그리곤 내게서 지휘봉마저 빼앗아 들었다.
“거기 코딱지 파는 놈 일어나!”서부터, 자기는 수업준비도 안해온 주제에 “교과서 없는 놈 이리 나와!”까지 할 건 다 한다.
그런데 그 많고 많은 시, 소설들 중 하필이면 놈이 고른 게 바로 다음 시조다.
▽난초(蘭草)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짓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문학 교과서에 나오는 가람 이병기의 이 시조는 사전 지식이 있으면 ‘아 그런가 보다’ 하지만 언뜻 보면 아주 요상하고 묘한 작품이 되고 만다. 그런데 이 놈에게 사전 지식이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1행은 그런대로 잘 넘어갔다. 그러나 2행의 첫 구절을 놈이 놓칠 리 없다. ‘자짓빛 굵은 대공’에 밑줄을 좌악 그은 것까지는 좋았다. 애들이니까.
그런데 자식이 미술시간으로 착각했는지 칠판 가득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닌가. 이어 3행의 ‘이슬은 구슬이 되어’를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무사히 넘어가나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갸우뚱.
“?”
칠판으로 홱 돌아서더니 어디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분필로 굵은 대공 끝(?)에 구슬을 방울방울! 애들은 애들대로 난리가 났고, 수업은 난장판이 된지 오래다. 와중에 수업 분위기를 건져주려는 듯 한 학생이 구세주처럼 일어난다.
“이 시의 문체를 말씀해 주시죠.”
“아, 무∼운체. 좋아요. 아주 좋은 질문이에요. 음…. 명조체!”
“푸하하.”
“그럼 이 시의 성격은 뭡니까?”
“성격? 아주 착해.”
“푸하하, 푸하하, 푸하하.”
선생을 보며 호쾌하게 웃는 놈들. 아무래도 이놈, 아니 놈들이 진짜 선생인 날 보고 웃는 것 같다. 좋아. 다음엔 ‘나도 학생’이란 코너를 만들어 이번에는 내가 한 번 놈들을 비웃어 주리.
전성호(41·휘문고 국어교사)ohyeah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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