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은 수 천 년 전부터 있었으며 흐려진 양심을 가진 학자들도 일찍부터 있었던 만큼 曲學阿世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西漢(서한)의 景帝(경제)는 好學君主(호학군주)로 창업초기의 혼란했던 國基(국기)를 바로잡고 漢나라의 기틀을 세웠던 帝王이다. 그의 文治(문치)에 힘입어 국력을 크게 떨친 이가 뒤를 이어 즉위한 漢武帝(한무제)임은 다 아는 일이다.
즉위 초 그가 맨 처음 착수한 것은 賢人(현인)의 등용이었다. 이 때 부름을 받은 자가 山東(산동)의 노학자였던 轅固生(원고생)이다. 나이 아흔이었지만 대쪽같은 성품에다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景帝는 그의 성품을 높이 샀던 것이다.
한편 그가 부름에 응했다는 소문을 들은 일부 젊은 似而非(사이비) 학자들은 어떻게든 그의 出仕(출사)를 막으려고 했다. 그들은 景帝에게 간언했다.
“저 늙은이는 아무 쓸모도 없습니다. 머지 않아 죽을텐데 그저 집에서 손자나 업어주도록 놔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景帝는 그들의 讒言(참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침내 그를 등용했다. 그때 그와 함께 부름에 응한 자로 同鄕(동향)의 公孫弘(공손홍)이란 소장 학자가 있었다. 그 역시 ‘이 놈의 늙은이를…’하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轅固生은 개의치 않고 점잖게 타일렀다.
“이보게 젊은이! 지금 學問의 道는 사라지고 邪說(사설)이 판을 치고 있네. 자네는 아직 젊고 학문을 즐기는 선비가 아닌가. 이럴 때일수록 열심히 익혀 正道(정도)를 펴게나. 아무쪼록 학설을 굽혀(曲學) 세상의 속물들에게 아첨(阿世)하지 말고….”
公孫弘은 그의 절개와 인격에 감복한 나머지 무례를 사과하고 그의 제자가 되기를 자청했다. 이 때부터 轅固生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다투어 그를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젊은이들이 나타났다. 당시 내로라 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의 弟子였음은 물론이다.
‘曲學阿世’가 장안의 화두로 등장했다. 知識人으로서 그것보다 더 모욕적인 말도 없을 것이다.
鄭 錫 元(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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