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스페인의 문명비평가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작은 연구실에 틀어박혀 한 줌의 문제만을 파헤치는 ‘과학자’가 세계의 일반적 문제에 참견하는 것은 옳지 않다.”
70여년이 지난 지금, 서른 살의 물리학자 정재승에게 이 말은 잠꼬대에 불과할지 모른다. ‘복잡성의 과학’을 주로 연구하는 그는 카오스 이론과 프랙탈 이론 등 몇 개의 개념을 이용해 ‘세계의 일반적 문제들’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관심사는 ‘작은 연구실’을 벗어나 증시 등락, 법률적 정의(正義), 교통문제와 음악 미술에 이른다. “물리학 이론이 부의 사회적 재분배에까지 도움을 줄 수 있다”니, 가세트가 입을 딱 벌릴 일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현실이다. 1980년대에 이미 NASA의 과학자들이 월 스트리트에 진출하기 시작했다(170쪽). 주가 지수의 변동이 과연 랜덤(무작위)한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주가 지수가 복잡하지만 끊임없이 유사한 구조를 되풀이하는 ‘프랙탈 신호’라는 것을 알아냈다. 의미 깊은 성과였다. 증시에서는 50%의 확률보다 조금만 더 잘 예측할 수 있어도 떼돈이 몰리기 때문이다.
물리학은 복잡한 시내 교통에도 적용된다(176쪽). 한밤중 한적한 대로의 차 흐름은 기체와 유사하며, 출퇴근길 차들의 행진은 액체와, 정체 지역의 움직임은 고체와 대응된다. 슈퍼 컴퓨터를 이용한 ‘입자 시뮬레이션’을 통해 교통정체를 효과적으로 해소하게 될 날도 멀지 않은 것일까.
“어떤 조직에서나 20%의 사람이 80%의 일을 한다”는 20/80 이론도 물리학자의 책상 위에서는 ‘노동 착취의 논리’ 나 농담이 아니다(110쪽). 그것은 잘 쓰이는 단어(word)의 서열, 웹 페이지의 조회빈도 등 자연과 인간사회 어디서나 적용되는 법칙의 한 표현일 뿐이다.
그 밖에…. O. J. 심슨 공판이 담고 있는 확률논리의 허실, 웃음의 생물학, 잭슨 폴록의 추상회화에 담긴 카오스 이론 등 책이 포괄하는 관심사는 실로 다양하다.
“자연과 사회는 혼돈스러운 패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오늘날 물리학은, 복잡한 패턴들도 몇 개의 변수만으로 이루어진 방정식으로 기술될 수 있으며, 일부 예측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책이 유달리 ‘뜨거운’ 것은 각광받는 이론을 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네이처’ ‘사이언스’ 등 유명 과학저널에 실린 최신 성과물을 선도(鮮度) 90% 이상으로 담아올렸고, 주제마다 상세한 참고자료 목록과 웹사이트 주소를 적어두었다. 때로 주관적이고 때로 ‘논쟁적’일수 있는 주장들에 독자가 동시적(同時的)으로 참여하기를 자극하는 것이다.
이 ‘사이언스 콘체르토’는 20개 주제를 네 개 ‘악장’으로 묶었다. 저자가 붙인 악상기호처럼 때로는 ‘빠르고 경쾌하게’(Vivace), 때로는 ‘장중하게’(Grave) 읽히기를 기대한 것일 터다.
책을 덮고서 남는 느낌은? ‘매우 의미깊다’(Molto Espressivo).
저자는 한국과학기술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예일대에서 박사후 연구원을 거친 뒤 올해 2월부터 고려대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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