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劃 一(획일)

  • 입력 2001년 7월 16일 01시 01분


劃 一(획일)

劃-그을 획 熟-익을 숙 端-끝 단

獨-홀로 독 庸-화할 용 覇-패업 패

成熟(성숙)되지 못한 사회일수록 思考와 行爲에서 단순함이 강조되며 劃一과 極端(극단)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가미카제(神風) 특공대 조종사는 오직 ‘천황 만세!’를 외치면서 미국 군함에 자살공격을 감행했다. 현재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는 자유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사회다. 그런 사회는 개인의 다양성이 존중되며 그것이 다시 다양한 사회계층을 형성하면서 국가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다양한 사회는 결국 다양한 개인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나만 옳다고 여기는 獨善(독선)이나 ‘죽기 아니면 살기’식의 극단적인 사고가 있어서는 이룰 수 없다. 그것보다는 남을 함께 생각하는 兼善(겸선)과 兩端을 함께 추구하는 中庸(중용)의 자세가 필요하다. 무쇠는 단단하나 쉬이 깨어지며 강풍에 잘 견디는 것은 참나무보다는 하늘거리는 버드나무다. 요컨대 극단적인 방법이 꼭 강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秦始皇(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것은(기원전 220년)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격이었다. 당시 中原은 모든 면에서 6국 중심의 질서 하에 있었으며 전국 7웅 중 秦나라가 앞선 것은 군사력 뿐이었다. 그것도 일찍부터 법가를 채택하여 백성을 닦달한 결과였다. 그들에게는 농한기라는 것이 없었다. 잠시라도 틈만 나면 군사훈련장으로 내몰았다. 이를 어기면 가혹한 제재가 따랐다. 法家의 정치적인 목표는 간단하다. 嚴(엄)한 法을 이용하여 劃一化를 꾀한 다음 궁극적으로는 覇業(패업)을 추구한다. 현대식 용어로 말하면 軍國主義(군국주의)다.

결국 天下의 劃一化를 꾀하게 되니 그것이 統一이었다. 후에 秦始皇은 內治에서도 劃一化를 추구했다. 문자 도로 화폐 도량형 服飾(복식) 수레 등. 모든 것을 秦의 기준에 따라 맞추게 했다. 물론 많은 반발이 있었다. 여기에다 과거 6국 백성들은 秦의 가혹한 법에 견딜 수가 없었다. 여기 저기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특히 儒家를 위주로 하는 지식인들로부터 반정부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제 思想까지 劃一化할 필요가 생겼다. 儒家들의 모든 책을 불사르고 학자들을 생매장시켰다. 유명한 焚書坑儒(분서갱유)다(기원전 213년).

이제 지식인의 입을 틀어막았으니 秦始皇도 두 다리를 쭉 펴고 잘 수 있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것은 劃一이 아니라 亡國의 시작이었다. 秦나라는 6년 뒤에 망하고 말았다.

鄭 錫 元(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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