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톨스토이(1828∼1910년)가 남긴 소설 ‘전쟁과 평화’는 이런 부담에서 예외가 될 듯하다. 분량이 기존 작품의 절반인 ‘최초 판본’이 나왔기 때문. 이 책은 지난해 러시아와 독일에서 출간됐으며 최근 국내 이룸출판사가 500쪽짜리 3권으로 번역해 선보였다.
‘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러시아 귀족사회의 동요를 그린 대작. 이번 출간된 최초 판본은 최종본에 많이 나오는 철학적 정치적 서술이 거의 없이 스토리 위주로 이뤄져 있다.
‘전쟁과 평화’는 최종 필사본만 남아있고 최초 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최초 판본을 발굴할 수 있었던 것일까.
톨스토이는 6년간 작업 끝에 1866년 가을 ‘전쟁과 평화’ 최초본을 완성했다. 그는 같은해 11월 원고를 들고 모스크바를 찾았지만 출판사 사정으로 출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1868∼1869년에 걸쳐 수정을 거듭하는 대대적인 보완 작업을 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전쟁과 평화’는 이런 증보 과정을 거쳐 완성된 최종본이다.
이번에 발간된 최초 판본은 최종 필사본에서 가필된 부분을 솎아낸 것이다. 이는 톨스토이가 초고 위에다 글을 지우거나 새로운 글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개작한 집필 습관 때문에 가능했다.
러시아의 톨스토이 연구가인 에벨리나 자이덴슈르는 장장 50년에 걸쳐 5000장에 달하는 최종 필사본을 검토, 글씨체와 잉크색깔, 작가가 원고지 옆에 쓴 집필날짜 등을 일일이 확인해 최초 판본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이 책은 지난해 러시아와 독일에서 출간되자마자 큰 붐을 일으켰다. 이야기와 상관없이 수 십쪽씩 차지하기 일쑤인 장황한 대화나 논평이 없어 재미있게 읽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독일 언론은 “톨스토이는 위대한 철학자에서 위대한 작가로 다시 돌아왔다”고 평했다.
스토리 면에서도 최종본과 비교할 때 ‘전쟁’은 적어졌고 ‘평화’는 더 많아졌다. 특히 전쟁 묘사에 있어서도 감정적 애국주의에 매몰된 상투적인 표현이 거의 없다. 톨스토이가 균형감각을 갖춘 냉정한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병사들의 비도덕적인 행동들이 구체적으로 묘사된 것이나, 러시아를 침략한 ‘악의 화신’ 나폴레옹에 대해서는 적대감보다 인간적 면모를 부각시킨 것이 이런 예다.
최초 판본을 통해 독자들은 극적인 드라마에 비중을 두었던 ‘소설가’ 톨스토이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 학계 일각에서는 복원 과정에 실수가 있을 수 있다며 초판본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