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평소 알고 지내던 외국인 교수 한 명이 도서관 맨 위층에 위치한 내 연구실로 찾아왔다.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고 나자 그가 문득 물었다. “한국 학생들은 왜 발을 끌고 다니지요?” 한국 학생들은 계단이나 복도에서 신발을 질질 끌며 걷기 때문에 소음과 불쾌감을 유발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떠난 후에 도서관의 계단에 나가 살펴봤다. 아닌 게 아니라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마치 등산이라도 하듯 쿵쾅거리며 발을 박차고 다니고, 여학생들은 따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샌들을 끌고 다니는 것이었다. 또한 복도에서는 좌충우돌하며 돌진해오는 사람들 때문에 어깨를 부딪히기 일쑤고, 심지어 계단 위에서 떠들며 내려오는 일렬횡대의 무리를 피해 한쪽으로 비켜서야만 했다. 이제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은 옛말이 되고 동방무례지국으로 전락해, 심지어 예절마저도 서양사람들에게 배워야 할 형편이 된 것이다.
‘걷는 일’은 수신(修身)의 기본이다. 유교전통에서는 ‘걷는 모양’으로부터 시작해서 ‘숨쉬는 모양’에 이르기까지 아홉 가지 몸가짐(九容)을 ‘수신’의 기본 대상으로 여겨왔다. 또한 베트남의 틱냑한 스님은 ‘걷기를 통한 참선’(行禪)을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방법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수신이나 수행이 꼭 다리를 틀고 앉아 선정에 드는 일만은 아닌 것이다. 허운(虛雲) 선사는 ‘참선요지(參禪要旨)(여시아문, 1999)에서 이렇게 말한다. “물 길어오고 나무해오는 일상사가 묘도(妙道) 아님이 없으니, 밭매고 씨뿌리는 것이 모두 선기(禪機)인 것입니다. 하루종일 다리를 틀고 앉아야 비로소 공부하고 도를 닦는 것은 아닙니다.”
현대인의 바쁘고 거친 걸음걸이에는 타인에 대한 무례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무관심이 동시에 들어 있다. 정화(正和) 스님은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장경각, 1996)에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것을 권한다. “고요히 앉아 있을 때는 호흡을, 걸을 때는 발의 감각을, 생각이 일어날 때는 생각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이 바로 정념(正念) 수행입니다. 매 순간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흐름에 명철하게 깨어있는 것이 바로 참다운 자기에 이르는 길입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연기(緣起)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흐름’인 것을 이해할 때, 비로소 마음은 활짝 열리게 되고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자비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유교의 수신, 불교의 수행, 도교의 수련, 그리고 크리스트교의 수덕은 서로 만나게 된다.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잊고 지내던 중요한 전통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수행의 전통이 아닐까?
이승환(고려대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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