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XXXX 문예지입니다.”
“제가 시를 좀 쓴게 있는데… 혹시 지면에 실어주실 수 있을까요?”
“일단 작품을 봐야겠지만 인사치레로 (문예지를) 몇 권 사주신다면야…”
“한 열권이면 되나요?”
“아뇨, 100권은 사주셔야되는데.”
“그럼 나중에 시집도 거기서 내주실 수 있나요?”
“한 250만원에서 300만원 정도 부담하시면 가능하죠. 별도로 시집 100권 정도는 사주셔야되고. 우선 소정의 입회비를 내시고 잡지 회원으로 가입하셔야되구요.”
최근 기자가 신원을 밝히지 않고 서울의 한 문예잡지사 직원과 통화한 내용이다. 직원은 “등단하시는 비용치고는 얼마 안되는 돈”이라면서 “몇 년 전만해도 시인 ‘자격증’을 받는데 1000만원도 들었지만 요즘은 많이 저렴해진 편”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기자가 “시를 잘 쓴 것 같지 않다”고 발을 뺐더니 “다 방법이 있다”며 유혹을 계속했다.
이처럼 몇몇 문예지를 중심으로 돈을 받고 지면에 시를 실어주는 일이 횡행하고 있다. 특히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게 창작할 수 있는 시 분야에서 심하다.
시인 원구식씨는 월간 ‘현대시’ 7월호에 실린 ‘음지에서 양지로의 이동’이라는 글을 통해 시단의 부패상을 고발해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원씨는 이 글에서 “120개 문학지 중 제대로 된 것은 15개 내외로 나머지 대부분은 순수하지 못한 시 전문지들”이라면서 “팔리지도 않는 문예지가 이렇게 많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한마디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원씨가 꼽는 실제 사례는 기자의 체험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단 책값을 1만원 정도의 고가로 책정하고 매달 10여명의 문인을 등단시킨다. 100여권씩 의무적으로 구입케 만들면 1000만원의 판매대금이 보장된다. 이와 별도로 시를 실어주고 편당 10만원씩 게재료를 받기도 한다. 이들에게 모두 정기구독료를 챙긴다. ‘장사’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등단시킨 아마추어 작가를 모아 협회나 시 단체를 구성해 회비를 걷는다. 또 이들의 시집을 출판해주고 상당한 이익을 챙긴다.
원씨는 “어느 문예지는 지난 10년간 1000명의 문인을 배출했으니 기업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최근 들어 심각해진 것은 이들이 순진한 문학도들을 ‘사냥’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된 사냥터는 대학 부설 평생교육원이나 사회교육원, 백화점 문화센터의 문예창작반, 지방의 시인학교나 시 동호회 등.
이곳에서 가르치는 강사 중 일부는 이런 문예지와 커넥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방에서는 해당 지역의 문학단체 간부가 직접 문예지를 만들어 거간꾼으로 나섰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같은 일이 가능한 것은 아무리 3류 잡지라도 추천을 받아 작품만 실리면 문인이 되는 ‘등단 제도’ 때문이다. 한 시인은 “3류 문예지로 등단했다는 시인들은 대개 사단법인으로 등록된 협회에 가입하고 자신을 뽑아준 사람에게 투표한다”면서 “이런 식으로 회원을 확보한 문학단체들이 정부가 주는 각종 문예지원금까지 받아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