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물도 쉬기가 일쑤였는데 그저 구멍이 숭숭 뚫린 대소쿠리에 담아서 쥐라는 놈을 피하기 위해 서까래에 못을 박아 허공에 걸어 두는가 하면 두레박에 담아 우물물에 띄워 두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다면 아예 전기 자체가 발명되기 전 우리 조상들은 한여름에 어떻게 얼음 맛을 보았을까. 기록에 의하면 신라 때부터 겨울에 꽁꽁 언 얼음을 따서 거대한 氷庫(빙고·일명 凌陰)에 보관했다가 여름에 꺼내 사용했다고 한다.
물론 氷庫는 얼음을 채취, 운반하기 쉬운 강가에 짓는 것이 상례였다. 현재 경주에 石氷庫가 남아 있으며 서울의 東氷庫와 西氷庫가 한강변에 있었지만 이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氷庫는 安東 昌寧 淸道 등 전국에 걸쳐 곳곳에 남아 있다.
겨울에 얼음을 채취하는 것을 伐氷(벌빙)이라 했으며 그것에 종사하는 사람을 氷丁(빙정 또는 氷夫)이라고 했다. 伐氷은 아득히 먼 3000년 전 중국의 詩經에 기록이 보이는데 12월 엄동설한에 얼음을 따서 氷庫에 보관한 다음(藏氷) 이듬해 2월 또는 春分을 맞아 꺼내 사용하는 것(開氷)으로 되어 있다. 이때는 司寒祭(사한제)라는 제사를 성대하게 올린다.
우리나 중국이나 얼음을 관리하는 것은 국가의 大事였다. 조선시대의 경우, 대체로 강(漢江)가에 거주하는 경기도민을 부렸으나 때로 강원, 충청도의 도민까지 동원하여 民弊(민폐)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이들은 엄동설한 강가에 나가 며칠이고 留宿(유숙)하면서 얼음이 두껍게 얼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 때문에 凍傷(동상)을 입는다든지 심하면 얼어죽는 경우도 있어 원성이 자자했다.
이렇게 저장한 얼음은 여름이 되면 宗親이나 堂上官 이상의 관리에게 下賜됐는데 그것을 頒氷(반빙)이라고 했다. 하지만 民弊를 감안하여 頒氷과 氷庫의 수를 줄이자는 上奏도 많았다.
鄭錫元(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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