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9년 6월 독일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은 새 지휘자로 영국 출신의 사이먼 래틀을 선택하는 ‘용단’을 내렸다. 40대 중반에 지나지 않고 국제적인 경력도 전무하다시피 한 사이먼 래틀의 발탁은 어느 모로 보나 파격적이었다. 그렇지만 이는 21세기 벽두 지휘자들의 전 세계 대이동을 알리는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우선 동독 출신 지휘자인 쿠르트 마주어가 뉴욕 필을 사임하고 유럽(런던 필하모닉)으로 되돌아갔다. 뉴욕 필은 후임으로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로린 마젤을 영입했다.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은 오슬로 필하모닉의 마리스 얀손스를 데려왔고, 오슬로 필은 앙드레 프레빈을 상임지휘자로 임명했다. 또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볼프강 자발리시의 후임으로 크리스토프 에센바흐를 선택했다. 일본 출신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가 사임한 보스턴 심포니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예술감독인 제임스 레바인을 새 음악감독으로 모셔오기 위해 애쓰고 있다. 멀리 러시아에서는 푸틴이 직접 볼쇼이 극장의 예술감독으로 낙점한 게나디 로제스트벤스키가 1년을 못 채운 채 사표를 던졌다.
◇러시아 볼쇼이 극장은 파산 위기
베를린 필의 지휘자를 배출한 영국도 ‘지휘자족의 대이동’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다. 100년 전통의 BBC 프롬스 페스티벌은 올해 사상 처음으로 미국인 지휘자인 레너드 슬래트킨에게 프롬스 라스트 콘서트의 지휘봉을 넘긴다. 슬래트킨이 BBC 심포니의 상임지휘자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프롬스 라스트 콘서트는 관객이 ‘유니언 잭’을 흔들어대며 영국 국가인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와 ‘오 브리타니아’ 등을 합창하는 떠들썩한 음악회다. 이런 프롬스 라스트 콘서트를 미국인이 지휘한다는 것은 영국인들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일임에 분명하다.
영국 로열 오페라 역시 이탈리아 출신인 안토니오 파파노를 음악감독으로 임명했다. 일본계 미국인인 켄트 나가노가 할레 오케스트라를 맡고 쿠르트 마주어가 런던 필하모닉의 지휘자가 된 것까지 감안하면 영국의 오케스트라는 외국인 지휘자들이 평정한 셈이 되었다.
한편 사이먼 래틀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자로 활동하기도 전에 폭탄선언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래틀은 베를린 시에 베를린 필하모닉에 대한 금전적 지원을 강화해 주는 동시에 일체의 정치적 간섭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두 가지 사항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그는 2002년 가을로 예정된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 취임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베를린 필 단원들이 래틀을 지지하고 나서자 베를린 시는 래틀의 요구를 전면 수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단 급한 불은 끈 상태지만 적잖은 사람은 시 당국과의 갈등으로 삐걱거리는 베를린 필의 앞날에 대해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베를린 필이나 볼쇼이 극장이 겪는 홍역은 냉전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베를린 필은 독일이 통일되기 이전, 서독 예술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서베를린 시는 베를린 필을 통해 서독의 음악 수준이 동독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려 했다. 자연히 베를린 필은 서베를린 시의 지원을 독점하게끔 되었다. 베를린 필에 대한 베를린 시의 과시욕은 통일이 된 지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달라지지 않았다. 현재 베를린 필에는 동독 출신 연주자가 한 사람도 없다. 시 당국은 새로운 단원을 선발할 때마다 서독 출신 연주자로 지원 자격을 제한해 왔다. 이를 두고 영국의 일간지인 ‘데일리 텔레그라프’는 베를린 시 당국이 아직 냉전 시대에 살고 있다고 꼬집었다.
러시아의 볼쇼이 극장이 안고 있는 문제는 베를린 필하모닉보다 한층 더 절박하다. 소비에트연방의 붕괴 이후 정부의 지원이 줄어들면서 볼쇼이 극장은 파산 위기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푸틴 정부는 극장을 살리기 위해 지휘자 게나디 로제스트벤스키를 영입했지만 그 역시 뾰족한 해법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결국 9개월 만에 퇴진한 로제스트벤스키는 정부가 극장을 구할 방안만 요구하고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않았다며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지휘자들이 전 세계적으로 자리를 맞바꾼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영국의 음악전문지 ‘그라모폰’의 한 필자가 이런 우스갯소리를 했다. “과거에는 미국 대통령이 ‘음악’을 이야기하면 모두 클래식 음악 이야기로 알아들었다. 그러나 클린턴 이후로 음악은 색소폰이나 팝을 지칭하게끔 되었다.” 일견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만큼 클래식 시장의 현 상황은 심각하다. 공연장을 찾는 이들은 은퇴한 노인들뿐이며 젊은이들은 클래식 음악에 철저하게 등을 돌리고 있다. 음반사들은 더 이상 새로운 오페라나 관현악곡을 녹음하지 않는다. 최근 워너뮤직은 유럽의 사무소를 폐쇄하는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BMG 역시 클래식 음반의 녹음을 거의 중단한 상태다.
◇제왕형 지휘자 나타나기 힘들 듯
지휘자들의 대이동은 이러한 추세 속에서 조금이나마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몸부림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별반 참신한 인물이 없는 상황에서 지휘자들의 대이동은 ‘아랫돌 뽑아 윗돌 괴기’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70대 중반에 들어선 앙드레 프레빈이나 로린 마젤이 오케스트라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나마 55세로 ‘젊은’ 지휘자의 선두 주자인 주세페 시노폴리는 지난 4월 오페라 ‘아이다’를 지휘하다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올해 영국 BBC 심포니의 상임지휘자로 임명된 레너드 슬래트킨은 클래식 음악의 위기에 대해 나름의 대안을 내놓았다. “지휘자들이 지나친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다. 오늘날의 지휘자들에게는 쇼 비즈니스에 대한 감각이 필요하다.” 슬래트킨이 생각하는 21세기의 이상적인 지휘자는 지휘를 잘 하는 동시에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다독거리고, 연주자들을 적절하게 섭외하며, 지역 사회에서 오케스트라가 설 자리를 찾아낼 줄 아는 지휘자다. “이같은 능력을 복합적으로 지니지 못했다면 아무리 지휘를 잘 해도 오케스트라에 고용되기는 힘들 것이다.”
슬래트킨의 말처럼 21세기의 지휘자가 갖추어야 할 능력은 적절한 융화력과 상황 판단력일지도 모른다. 오케스트라 단원들 역시 제왕처럼 군림하려는 지휘자를 더 이상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고전’인 클래식 음악마저 살아남기 위해 세태의 흐름에 편승해야 한다는 사실은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지녔던 푸르트벵글러나 카라얀, 솔티 등 ‘19세기형’ 지휘자들의 모습이 새삼 그리워진다.
< 전원경 기자 > winnie@donga.com
<주간동아 제297호/2001.8.16>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