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정오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앞. 버거킹 오른쪽으로 난 좁은 골목길이 점심을 먹으러 나온 회사원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어둠침침한 골목길에 빽빽하게 들어선 음식점. 두 사람이 간신히 지나칠 수 있는 골목에서 한끼 메뉴를 고르는 이들의 발길이 부산하기만 하다.》
▽서민의, 서민을 위한 먹자골목〓점심과 저녁시간 피맛골은 구수, 매콤, 푸짐한 각종 요리가 행인들의 발길을 붙든다.
‘서린낙지’ ‘실비집’ ‘조방낙지’에서는 낙지볶음의 ‘매서운 맛’을 볼 수 있다. 생선구이의 구수함에 이끌렸다면 ‘함흥집’, 녹두빈대떡에 막걸리라면 ‘열차집’, 아바이순대나 순대국이었다면 ‘삼성집’이다. 복탕수육에 이과두주를 걸치고 싶으면 53년 전통의 중국요릿집 ‘신승관’, 쓰린 속을 달래려면 청진동 해장국 골목도 좋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한일관’의 불고기 맛도 빼놓을 수 없다. 시원한 사골맛이 그리우면 국세청 뒤편 1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이문설농탕’이 안성맞춤. 인사동으로 이어지는 ‘피맛골 주점가’의 학사주점 거리는 젊은이들의 유쾌한 목소리로 떠들썩하다.
저렴한 가격과 푸짐한 인심이 이곳의 자랑. 그런 탓에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손님들이 몰린다. 종로2가 국세청 건물 꼭대기에 자리잡은 ‘탑클라우드’는 다소 부담스럽긴 하지만 서울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1920년대 후반 서울 종로 거리. 비포장도로이고 가로수 가로등이 없다. 종로에는 1935년 가로등이 설치됐다. |
▽골목의 정취를 즐기는 사람들〓“서로 어깨를 부딪쳐도 ‘짜증’이 나지 않는 곳이 피맛골이에요.”
피맛골에서 18년째 카페 ‘시인통신’을 운영해오는 한귀남씨(57·여)는 ‘피맛골의 매력’으로 인간미를 첫손가락으로 꼽는다.
업소주인들은 뒷골목에 가게들이 밀집해 있어 특유의 ‘뒷골목 문화’가 있고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좀처럼 떠나기가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대학생 이진호씨(28·서울 동작구 흑석동)는 “친구들과 왁자지껄 떠들며 술마시기에는 대로변 깔끔한 술집보다 피맛골이 훨씬 낫다”며 “옛날에는 말을 피해 다녔을지 몰라도 요즘은 종로 대로변의 사람들과 노점상을 피해 피맛골로 다니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1933년 서울 종로의 모습. 비각(왼쪽 하단, 현 교보빌딩 자리)과 구 동아일보사옥(현 일민미술관) 사이로 종로 대로가 시원스럽게 뚫려있고, 대로변 건물 안쪽에 피맛골이 종묘 방향으로 이어져 있다. 6·25 전쟁 이후 도로가 남측으로 확장되고 각종 건물이 들어서면서 현재는 북측 피맛골만 남아있다. |
▽피맛골에 부는 변화의 바람〓최근 피맛골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다. 과거 일류 요정으로 꼽혔던 명월관 자리에 있던 피카디리 극장은 현재 재건축이 한창 진행중이다. 또 청진동 제6지구 일대에 재개발 움직임이 일면서 세입자들이 “피맛골 특유의 골목구조가 훼손될 것”이라며 집단으로 반발하기도 했다.
반면 주변 인사동 북촌 지역과 묶어 관광상품으로 육성하자는 목소리도 높다. 인사동과 북촌이 ‘도자기’와 ‘골동품’으로 상징되는 상류층 문화를 대변한다면, 피맛골은 ‘뚝배기’와 ‘질그릇’으로 대표되는 서민 문화를 보여준다는 것.
서울 YMCA와 함께 ‘종로 북촌 문화산책’을 펴낸 장규식씨(연세대 강사·한국 근현대사)는 “피맛골은 전쟁과 산업화를 거치면서도 살아남은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며 “서울의 서민 문화를 보여주는 관광상품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피맛골'이란▼
세종로사거리에서 종묘까지 이어진 폭 2m 남짓한 비좁은 골목길이다. 평범한 뒷골목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조선 초기부터 600년간 꿋꿋이 이어 내려온 ‘역사와 전통’의 거리이다. 조선시대 서민들이 고관대작의 행차를 피해 말 한마리가 다닐 만한 좁은 골목길을 냈다고 해서 ‘피마(避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원래 종로대로 양쪽에 모두 있었으나 도로가 남쪽으로 확장되면서 현재는 종묘에서 교보문고 입구까지만 자취가 남아 있다.
<차지완기자>marudu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