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은은 그저 노래를 부르는 재능을 가진 자연인의 이름이 아니다.
1971년 김민기와 함께 스무 살의 양희은이 ‘아침이슬’로 등장했을 때 맑고 단호한 그의 목소리는 도도하게 융기하던 당시 청년문화의 깃발이 되었다. 그리고 70년대 후반의 암흑기를 포크 가수 이주원과 동행하며 그 목소리가 ‘들길 따라서’를 토해 냈을 때 처녀는 여인으로, 서사는 서정으로 이행했다.
그가 80년대 중반 하덕규와 함께 ‘한계령’에 올랐을 때 우리 대중음악사는 가장 정결한 허무주의의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1991년 여름, 불혹에 접어든 양희은은 미국의 허름한 스튜디오에서 어쿠스틱 기타 하나를 달랑 들고 날아온 기타리스트 이병우와 단촐하지만 의미심장한 중년의 음악시집 한 권을 조용히 분만해 낸다.
양희은은 한국 대중음악사상 가장 혁명적인 보컬리스트 중 한 사람이다. 그의 톤과 에너지와 발성은 애상과 영탄으로 점철되어온 한국 대중음악의 짙은 내적 상처를 일거에 치유했다. 그리고 윤심덕과 이난영 이후 쏟아졌던 여성 보컬리스트에 대한 가학적인 편견을 무력화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그는 보컬 하나만으로도 독창성과 역사적 의미를 발효시킨 거의 유일한 대중음악가인 것이다.
서구에 60년대가 있었다면 한국엔 70년대가 있었다. 서구 60년대 자유주의가 70년대의 문화산업에 회유 당하면서 순수한 영광을 마감했다면 한국 자유주의의 문제의식은 파시즘의 총칼 앞에 무장해제 당했다. 그 시대를 관류하는 양희은의 작품 연보는 바로 비틀거리며 혹은 아슬아슬하게 한국 현대사의 뒤안을 걸어온 70년대 초반 세대의 혁명적 낭만주의의 초상이다.
따라서 그의 음악 30년은 한국 대중음악사의 패러다임이 성숙하게 발효하는 진화의 시간 그 자체다.
그는 상처 입은 성난 젊음의 대변인으로 70년대를 보냈고, 백가쟁명으로 폭발하는 80년대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깊고 푸른 미의식을 표출했으며, 빠른 템포와 사랑의 찬가로 넘쳐나던 ‘10대의 나라’ 90년대에 이르러서도 중년의 삶의 성찰을 원숙하게 그려내었다.
양희은 같은 예술가를 지녔다는 사실만으로도 저 혹독한 검열의 시대였던 70년대와 80년대는 오히려 내면적 풍요의 시대로 기록되리라.
강헌(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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