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는 계속되고 있다. 요즘 네티즌 사이에 단연 인기 있는 영화음악(O.S.T)과 뮤직비디오는 아직 국내에 개봉하지도 않은 영화 ‘물랭루즈’(Moulin Rouge)다. 니콜 키드먼이 남편이던 톰 크루즈와 헤어지고 찍은 첫 영화이자, 이완 맥그리거와 함께 출연했고, 제54회 칸 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화제를 모은 이 영화의 히트곡은 ‘레이디 머머레이드’(Lady Marmalade).
여피족이나 보보스라면 M-TV나 STAR-TV의 ‘채널 V’를 통해, N세대라면 당연히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한번쯤은 보았을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노래가 감각적이기도 하지만(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했다), 노래를 부른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국내 10~20대에 폭발적으로 인기가 있는)와 다른 세 명의 늘씬한 미녀들이 내내 속옷 차림으로 퇴폐적인 분위기의 프랑스풍 살롱에서 촬영한 것으로, 눈요깃감으로 따지자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다. 그런데, 과연 10년 전이라면 영화보다 먼저 뮤직비디오가 히트치는 일이 가능했을까.
▼20년 전 M-TV 탄생은 ‘문화혁명’의 서막▼
지난 1990년 12월31일자 미국 ‘포천’지의 커버스토리는 ‘팝 컬처: 미국의 뜨거운 수출품들이 붐을 일으키고 있다’는 제목이었다. ‘포천’이 여기에서 꼽은 ‘뜨거운 수출품’으로서의 팝 컬처에는 마돈나, 코카 콜라, 터미네이터(국내 공중파 방송에서 아직도 틀어주는), 디즈니, 맥도날드 그리고 M-TV가 들어 있다. 이를 풀어보면 당시 젊은층은 맥도날드 햄버거와 콜라를 마시며 M-TV로 마돈나의 ‘라이크 어 버진’을 ‘보는’ 것이 유행이었다는 얘기다.
몸에 좋지도 않은 콜라라도 함께 마셔야 겨우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천박하고도 척박한 음식인 햄버거가 이 땅에 상륙해 당당한 기호식품으로 자리잡기까지에는 뮤직비디오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M-TV는 일종의 ‘문화혁명’이다. 지금으로부터 딱 20년 전인 81년 8월1일 자정이 지난 뒤 이름도 없는 케이블 TV인 M-TV가 우스꽝스러운 영국 출신 듀오 버글스의 ‘Vedeo Killed the Radio Star’를 처음으로 내보냈을 때만 해도, 정말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보낼’ 줄, 오늘날처럼 젊은이들의 ‘일용양식’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 이제 뮤직비디오와 M-TV는 젊은이들의 하위문화를 지배문화로 끌어올렸고, 70년대 통기타와 생맥주·청바지 문화는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전 지구적 붐을 만들어 냈다. 할렘가 흑인의 마이너 문화인 갱스터 록과 랩, 힙합, 그리고 길거리농구가 오늘날 피부색과 빈부 격차에 상관없이 유행하게 한 것도 M-TV의 뮤직비디오였다.
그렇다면 24시간 내내 뮤직비디오만 틀어대는 M-TV가 젊은 피를 들끓게 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M-TV 사장인 톰 프레스턴은 “비일관성이 우리의 일관성이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변화하기, 재창조하기, 5분마다 룰을 다시 쓰는 게 룰이라면 룰인 것. 그래서 M-TV는 ‘14~29세의 젊은이에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끊임없이 변하는 시청자의 취향에 발 빠르게 대응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트렌드를 선도하는 마케팅 전략이고, 그리하여 M-TV의 뮤직비디오는 ‘젊은 피의 DNA에 새겨진 감수성’이 된다.
아직 ‘압구정’이 뜨기 전인 80년대 초반 학번을 가진 사람이라면 서울 종로 3가 피카디리 극장 옆 건물 지하의 SM(사디즘·마조히즘을 주제로 한 포르노 용어로서의 SM이 아니다)이라는 상호를 가진 초대형 음악다방(당시 용어로는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다)을 기억할 것이다.
몇 백 평 규모의 이곳은 장소의 넓이도 넓이려니와, 그 당시로서는 유행의 최첨단이던 뮤직비디오를 초대형 화면으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로 유명했다. 이곳에서는 ‘듀란 듀란’이, 여장 남자 보이 조지로 유명한 ‘컬처 클럽’이, 조지 마이클이 아직 솔로로 독립하기 전의 ‘왬’이, 좀비들과 싸우는 마이클 잭슨이, 마릴린 먼로가 부활한 듯한 마돈나가 ‘한국의 촌놈’들에게 ‘뮤직비디오는 이런 것이다’는 것을 오만하게 교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 땅의 젊은이들은 음악은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기 시작했고, 이 땅의 음악 역시 서서히 보는 것으로 변모해 갔다.
그로부터 20여 년. 이제 이 땅의 영화, 드라마, 패션, CF 등 모든 영상물에는 M-TV적 감수성이 넘쳐난다. 바로 M-TV에서 영상적 감수성을 자극 받은 세대가 ‘뮤직비디오적 감성’을 확대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추종자들의 열기와 거의 무분별할 정도의 수준인 전파력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 땅에서 20여 년이 흐른, 지난 7월에야 ‘M-TV 코리아’가 개국한 것은 ‘아이러니’라는 단어 이외에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예술 아닌 상품 ‘버블껌 음악’ 경계론도 제기▼
음악 사이트인 ‘다음 뮤직’과 ‘오이 뮤직’은 지난 7월20일~8월27일에 한국 대표 뮤직비디오 선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8월25일 오후 2시 현재 god의 ‘거짓말’이 무려 63만6550표(45%), 조성모의 ‘아시나요’가 57만8201표(41%), 포지션의 ‘I love you’가 4만2750표, 박지윤의 ‘성인식’이 3만6166표다. 한 사람이 하루에 한 번씩 투표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엄청난 호응도로 볼 때 적어도 몇 십만 명이 넘는 뮤직비디오 팬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대표 뮤직비디오로 뽑힌 가수는 오는 9월6일 뉴욕에서 열리는 ‘M-TV 비디오뮤직 어워드’에서 세계적인 가수들과 함께 상을 받는다.
분명 뮤직비디오는 우리 가요계의 외연을 넓히고 살찌우게 하였다. 보다 세련된 문화적 감수성을 유포시킨 것도 사실이다. 뮤직비디오와 함께 시작한 ‘쇼 비즈니스’의 성장이 없었으면 오늘날 중국과 대만에서의 ‘한류’(韓流) 열풍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보는 음악’의 붐은 ‘버블 경제’와 마찬가지의 거품론을 낳는다. 오늘날 음악은 ‘산업의 기획상품’이지 결코 예술이 아니기 때문에 ‘버블껌 음악’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뮤직비디오의 선정성과 폭력성의 오염에 대한 문제제기도 끊이지 않는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언론모니터팀은 지난 3월 “뮤직비디오가 가사 내용과는 무관하게 총기 난사 장면이나 성행위를 암시하는 장면 등을 자주 내보냄으로써 주시청층인 청소년의 인격 형성과 정서 함양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90년대 중반 얼터너티브 록의 대명사이던 그룹 스매싱 펌킨스는 “브리트니 스피어스(크리스티나 아길레라와 쌍벽을 이루는 10대 소녀가수) 때문에 그룹을 해산한다. 나도 앞으로 ‘보이 밴드’를 해야 할 판이다”고 씁쓸한 퇴장 인사를 남겼다. 심지어 마돈나마저도 “어린 가수들의 지배가 더 오래 가선 곤란하다. 그러다가는 좋은 가수와 음악이 다 사라진다. 음반회사들은 그런 음악에 관심조차 없다. 그러니 더욱 10대들만 음반을 산다. 우울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한다. 30대 이전 세대에게는 이제 이름마저도 생소한 가수 닐 영은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의 음악산업은 너무도 조악하고 잔인하고 강제적이다. ‘악마’를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 10~20대들은 여전히 뮤직비디오를 즐기면서 버블껌을 씹는다. 왜? ‘쇼’는 계속되기 때문에.
< 조용준 기자 > abraxas@donga.com
<주간동아 제300호/2001.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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