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이토록 중요한 인생사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사랑은 자아와 사회의 관계를 탐구하는 사회학에서 의미 있는 주제로 다뤄지지 않았다. 그것은 사회학자들이 태만했다기보다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코드화되어 있는 사랑을 다루기에는 건조한 사회이론이 역부족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새 학기 강의를 위해 다시 읽어 본 앤소니 기든스의 ‘현대사회의 성·사랑·에로티시즘’(새물결·1996년)은 바로 이런 사회학의 한계에 도전하는 야심만만한 책이다.
이 책의 원제목은 번역본의 부제인 ‘친밀성의 구조변동’인데,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원제목과 부제가 바뀌어졌다.
이 책에서 기든스가 겨냥하는 것은 오늘날 극도로 혼란스러운 사랑의 규범적 기반을 새롭게 모색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랑을 이렇게 커다란 혼돈 속에 빠지게 했을까. 이에 답변하기 위해 기든스는 ‘친밀성’, 즉 사랑과 섹슈얼리티의 장구한 역사적 변화를 추적한다. 이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18세기 로맨스의 ‘낭만적 사랑’과 근대 과학 발전에 따른 재생산(출산)과 사랑의 분리다. 전자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는 현대적 사랑의 원형을 이루었다면, 후자는 섹슈얼리티를 사랑의 핵심 요소로 부각시킴으로써 사랑의 아노미를 낳아 왔다. 오늘날 누구나 한 두 번 사랑으로 불안의 감정과 정서적 고통을 겪는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사랑의 혼란은 ‘후기 현대’ 사회가 직면한 중요한 딜레마의 하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혼란스러운 사랑에 대한 기든스의 대안은 ‘합류적 사랑’이다. 합류적 사랑이란 두 사람의 정체성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공존의 감정을 교환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함께 형성해 가는 사랑을 말한다. 간단히 말해, 차이 속에 동일성을 만들어 가고, 동일성 속에 차이를 승인하는 것이 사랑의 새로운 규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감정의 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는 이 원칙은 애정과 자발적 희생으로 포장돼 있으나 실은 가부장제와 미시적 폭력으로 얼룩져 있는 우리 시대 일그러진 사랑과 일상생활을 민주화할 수 있는 대안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문득 떠오른 것은 김수영이 쓴 ‘사랑’이란 시다. 김수영은 진정한 사랑이란 ‘불안한,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을 사랑하는 것이라 노래한다. 상대방의 불완전성을 깊이 이해하고 평등한 공존의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 이것이 바로 기든스의 메시지이자 ‘감정의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다. 원제 ‘The Transformation of Intimacy : Sexuality, Love and Eroticism in Modern Societies’(1992년)
김호기(연세대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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