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권성우 이명원 한기호 씨 등 '창비'에 대한 비판이 최근 계속되고 있다. '창비'는 이에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A.8월말에 '사회비평'에 권성우 이명원씨가 쓴 글에 대해 언론이 크게 보도했다. 기사를 보고 편집위원들이 회의를 했다.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된다는 논의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사회평론'에 실린 원문을 보고 반론을 펴는 것은 안하기로 의견이 모였다. 특히 권 교수의 글에는 '창비'를 아끼는 충정도 있는 것 같았고, 주로 비판을 당한 임규찬 교수도 반론에 적극적인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대신 언론사에서 이 문제에 대한 논평을 요구하면 내가 응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이쪽의 의견을 묻는 연락이 오지 않더라(웃음). 지금 동아일보가 연락한 것이 처음이다.
사실 이들의 비판에는 경청할 만한 점이 적지 않다고 본다. 기본적으로 '창비'의 역할에 대한 기대의 표현이고, 제대로 그 역할을 하라는 채찍질이라고 생각한다.
Q.권성우 교수의 비판부터 이야기해보자. 권 교수는 '열린 진보와 권위주의 사이'라는 글에서 중대한 사회현안에 대해서 성실한 대응을 회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A.이점은 사실 우리 편집위원들도 고민하는 부분이다. 창비가 한국지식사회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기민한 대응을 못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인정한다. 전혀 안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흡족하게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계간지라는 매체 성격상 현실문제에 직접적이고 기민하게 대응하기 어렵다.
하지만 앞으로는 성실하고 적극적으로 현실발언을 강화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국 '창비의 공공성'을 강화하자는 취지다.
Q.권 교수는 또 창비가 문지(문학과지성) 진영과 '전략적 밀월'을 통해 서로의 문학적 지분과 위상을 공고히하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A.창비와 문지는 일각에서 보는 것처럼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서로 비판적이면서 동지적인관계다. 4월 혁명의 계승자라는 측면에서는 같은 뿌리라고도 볼 수 있다. 70년대에 이문구나 조세희 같은 작가를 서로 공유했던 것이 일례가 될 것이다. 그 정신의 계승 방법상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Q.이명원씨는 '당신들의 기회주의는 위험하다'는 글에서 창비에 '진보 상업주의'의 혐의를 두고 있는데.
A.'진보 상업주의'라는 비판은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말이다. 지금 사회는 반(反)독재라는 단순구도로 문제가 풀리지 않는 회색빛이다. 우리로서는 현실의 변화를 인정하면서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야가야하는 이중의 어려움에 처해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씨의 주장처럼 "비판하지 않으니 기회주의다"고 싸잡아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차라리 그간 우리의 비판이 약했다면 수긍할 수 있지만…. 아직은 '창비'로서는 변화의 시대에 걸맞는 담론의 준거를 찾는 과정에 있다.
Q. 이명원씨 뿐 아니라 '송인소식' 최근호(9월1일자)에서 한기호씨도 신인작가 발굴의 소홀함을 지적하고 있는데.
A.그간 주목할만한 신인을 못낸 책임을 모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경림이나 고은씨처럼 다른 출판사에서 발굴했다가 창비로 들어와서 큰 작가도 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지금은 과도적인 단계라고 본다.
그리고 최근 우리 문학이 전체적으로 침체되어 있다. 70년대 문예부흥기에 비해서 대형신인을 발굴하고 생산되고 진지한 토론이 오가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게다가 '창비'의 작가 선별기준이 더 까다로워서 신인을 내기가 쉽지 않다.
Q.그러나 일각에서는 '창비'의 색깔과 맞지 않는 상업적인 작품을 내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A. 은희경씨의 '마이너리그'를 출간한 것을 두고 말이 많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일단 괘도에 오른 작가라도 작품의 기복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어느 수준 이상에 오른 작가라면 수준이 다소 모자라더라도 출간해야 한다. 일종의 중장기적인 투자다. 그래야 다음에 더 좋은 작품을 낼 수도 있다.
예를들어 은희경이나 신경숙의 소설을 '창비'에서 낸다는 것 자체로 비판할 수 없다. 시쳇말로 잘나가서는 작가라서 팔아먹으로고 소설을 낸다고 보면 곤란하다. 우리는 두 사람 모두 90년대가 낸 가장 중요한 작가로 판단하고 있다.
Q. 한기호씨의 글의 경우는 '창비' 필자의 폐쇄성을 비판하고 있다. 계간지가 '집안식구'의 잔치라는 지적인데 동의하는가.
A.사실 '창비' 편집위원이나 자문위원의 글이 많다는 것은 늘 반성해온 문제다. '창비'가 무슨 동인지도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우리의 뜻에 맞는 적절한 필자를 구하는 것이 생각보다 해결하기 쉽지 않는 난제다. 문학을 아는 지식인이 다양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층이 무척 얇다. 사실은 무지하게 외부 인사를 섭외하려고 가히 필적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뜻대로 잘 안된다.
Q.외부에서는 '창비'에 드리워진 백낙청 교수(계간 '창작과 비평' 편집인)의 그림자가 너무 짙은 것이 아닌가라는 지적도 있다.
A.백 선생은 '창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계간지를 오래 해봐서 노하우가 많아 배울점이 많다. 하지만 실무적인 문제는 본인이 바뻐서 간여하지 못한다. 전적으로 내 책임하에 계간지와 단행본이 출간된다.
백 선생이 5년전 나를 주간 자리에 앉힌 것도 내부적으로보면 권력 이양이다. 백 선생과 '창비'의 관계는 한마디로 '좋은 공조관계'다. 그런데도 외부에서 백 선생의 그늘이 크다고 느끼는 것은 나를 비롯해 뒷세대가 이을 잘하지 못한다는 말일 것이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하면 그런 지적은 더 이상 나오지 않으리라고 본다.
Q.그렇다면 앞으로 '창비'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인가.
A.사실 '창비'의 모토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이다. '법고'는 지금껏 잘했으니 96년 내가 편집주간이 되어서는 '창신'의 과제가 맡겨졌다. 여러 비판은 그간 내가 해야할 창비의 개혁개방을 잘 못해서 욕먹는 것 같아 착잡하다.
창비는 변화해왔고 변화해갈 것이다. 하지만 아직 변화의 꼴을 온전하게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애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창비의 독자는 두 부류다. 옛 독자와 지금 독자다. 옛 독자들은 "창비가 너무 변했다"고 질책하고, 새 독자들는 "창비가 너무 안 변한다"고 비판한다. 양쪽의 요구에 다 맞추기가 쉽지 않다.
Q.창비의 개혁을 말했는데, 그 방향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달라
A.'창비'의 역할은 두가지라고 본다. 한가지는 시대에 맞는 새로운 담론을 추구하는 작업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 사회의 현실에 실존적으로 개입하는 노력이다. 지금까지는 전자에 골몰하다가 후자를 놓쳤는데 이를 더 강화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창비' 내부토론을 활성화해서 창비의 공공성을 더욱 높여야 겠다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창비'를 비판하는 쪽에 대해 한가지 말하고 싶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기비판 자기반성 자기성찰 위에서 상대를 비판했으면 한다. 남을 비판할 때도 자기를 치는 심정으로 비판해야 '진정한 대화'라는 것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