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보 기자의 한집&반집]중반에 패 피한게 '잘못된 선택'

  • 입력 2001년 9월 9일 18시 34분


#대국 전

3일 오전 10시 서울 한국기원 본선대국실. 국내 상금 랭킹 2위인 LG정유배 4강전 대국이 열리는 날. 이창호 9단은 혼자 하릴없이 앉아있었다. 상대인 서능욱 9단이 나타나지 않은 것. 이 판을 이겨 결승에 오르면 우승을 못해도 최소 1000만원이 보장되는 대국에 지각을 하다니. 서 9단은 15분이 지나 허겁지겁 대국실에 들어섰다. 인천에 사는 그는 차가 밀려 늦었노라고 했다.

규정에 따라 제한시간 4시간 중 지각한 시간 15분의 2배인 30분을 공제했다. 1분 1초가 아쉬운 장고파라면 땅을 치고 후회할 일.

하지만 이날 인터넷 생중계 해설을 맡은 김일환 9단은 “3시간이라면 몰라도 30분 공제된 것은 초속기파 서 9단에겐 아무 피해도 없다. 더구나 서 9단이 이기려면 번개같은 속기로 이창호 9단의 혼을 쏙 빼야 한다”고 농을 던졌다.

#대국 중

예상 밖이었다. 백을 든 서 9단은 초장부터 시간을 물쓰듯 하며 신중한 행마를 했다.

대국 내내 그의 손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반상 위에 놓인 돌을 꾹꾹 눌러보기도 하고 바둑돌 2, 3개를 손바닥 안에서 이리저리 굴려보기도 하고…. 장고를 하지만 대국 버릇은 속기 때나 다름 없다. 바둑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원, 저렇게 정신없이 해서 바둑 두겠나”고 할 정도. 하지만 그 가운데서 서 9단은 수읽기의 리듬을 찾고 있었다.

중반 초입 무렵. 패를 둘러싼 흥정에서 백이 한발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장면도 백 1은 뻔히 보이는 수. 이곳은 참고도처럼 패가 나는 곳이다.

그러나 스스로 유리하다고 믿은 서 9단은 이 대목에서 갈등하기 시작했다.

‘팻감도 많지 않고 하변에도 패가 날 수 있으니 이쪽에서 패를 냈다가 어렵게 될 수도 있다. 쉽게 가자.’

그는 마음을 바꿔먹었다. 귀를 사석으로 버리고 외곽을 튼튼히 하기로 한 것.

하지만 이게 판단 착오였다. 흑은 엄청난 실리를 확보한 반면 백의 외곽은 생각보다 별 게 없었다. 더구나 흑 ○를 ‘가’로 살려나오는 수도 있어 튼튼하긴 커녕 허약해졌다. 서 9단은 오후 6시를 넘기면서 까지 끈질기게 버텼으나 8집반패.

#대국 후

이날은 마침 일본 메이진(名人)전 서울 도전기 전야제가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날. 내빈으로 참석한 서 9단은 기자와 다시 마주쳤다.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복기를 하던 대국 직후와는 달리 평상시 그의 화통한 모습 그대로 였다. 그래서 패자의 변을 들어봤다.

“중반 한 때 유리해서 무척 기분좋았죠. 그 때 최대한 실리를 챙겼어야 했는데 너무 조심하다가…. 하긴 이 9단에게 중반 무렵부터 유리하다고 생각한게 잘못이지요.”

<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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