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 녹두거리
서울 관악구 신림9동 서울대 부근. 매캐한 최루탄 냄새 속에서 소주잔을 부딪치며 시국을 논하던 80년대 학번들의 ‘저항의 공간’. 90년대엔 고만고만한 술집과 노래방 등이 활개를 쳐 ‘녹두 베이거스’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젠 ‘녹두’라는 말을 붙이기도 어색하다.
올 봄 문을 연 패스트푸드점 ‘롯데리아’ 뒤편에는 흰색과 검은색 ‘선(禪·Zen)’ 스타일로 깔끔하게 단장한 양주바 겸 호프 ‘마니마니 마니아’가 1주일 전 영업을 시작했다.
힙합, 밀리터리 패션으로 시선을 붙드는 남성복 전문점 ‘체크’도 전 같으면 도시적 이미지로 인기 있는 곳. 노랑머리를 한 김화원 사장(37)은 “평범한 ‘모범생 패션’을 혐오하는 멋쟁이들이 주로 찾는다”고 전했다.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도 녹두거리를 점령했다. ‘로즈버드’가 1년2개월 전 이곳에 맨 먼저 진출한 이후 최근 두세달 사이에 10여곳이나 생겨났다.
녹두거리 일대에 하나밖에 없는 사회과학 서점 ‘그날이 오면’의 주인 김동운씨는 이 같은 변화에 대해 “90년대 중반부터 학생들 사이에 폭넓게 퍼진 개인주의, 쾌락주의와 맞물린 것”이라고 분석.
안정룡씨(24·서울대 미학과 4년)는 “이제 녹두거리의 정체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면서도 “대다수의 학생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서울대생들의 또 다른 문화권인 봉천4거리(일명 ‘봉사리’)도 대변혁을 겪고 있다. 가볍고 빠른 것을 추구하는 학생 고객들의 입맛에 맞춰 최근 1년새 롯데리아, 맥도날드, 스파게티 전문점 ‘소렌토’, 커피전문점 ‘스타벅스’가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지하철 2호선 신림역 앞 신림4거리(일명 ‘신사리’)도 사정은 비슷하다.
◇ 고려대 참사리길
고려대 정경대 후문에서 이공대 캠퍼스에 이르는 거리. 지난해 지하철 6호선 안암역이 개통된 뒤 화려한 상점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있다.
호프나 소주집 대신 어두운 조명과 잔잔한 발라드 음악이 깔리는 ‘바’가 특히 많다. 칵테일이나 외국 맥주, 보드카 등을 마실 수 있는 ‘녹턴’ ‘퓨전’ ‘신라의 달빠’ 등이 인기.
80, 90년대 카페들은 ‘프라우스타’ ‘세리파’ 등 외국계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으로 바뀌었다.
MP3용 백폰을 귀에 끼고 선글라스를 쓴 학생들이 한 손에 커피를 든 채 인라인스케이트로 이곳을 활보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떡볶이나 어묵을 팔던 분식집은 패스트푸드점, 아이스크림 전문점에 자리를 내준 지 오래. 당구장은 PC방으로, 또 요즘 새로이 뜨는 ‘DVD방’으로 전업했다. ‘구치’ ‘샤넬’ ‘프라다’ 등 명품을 파는 안경점도 생겼다.
지하철 개통으로 학생들의 ‘놀이무대’도 넓어졌다.
임형선씨(22·고려대 영문과 3년)는 “지하철로 20∼30분이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압구정동이나 강남역에서 동아리, 동문회 모임을 갖는 친구들도 많다”고 말했다.
‘민족 고대’의 정체성 상실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졸업생인 안제응씨(27)는 “7년 전 화려한 인테리어를 한 카페가 참사리길에 들어선다고 했을 때 학생들이 ‘정서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시위를 벌였던 기억이 새롭다”고 말했다.
고려대 성영신 교수(심리학과)는 “전통과 여유로움을 포용하던 문화는 사라지고 고만고만한 술집과 음식점 등 값싼 ‘키치(kitsch)적’인 상점들만 남았다”며 아쉬워했다.
◇ 연세대 신촌거리
연세대 정문 앞 굴다리에서 지하철 2호선 신촌역까지 300m에 이르는 거리. 홍익대 앞, 이화여대 앞 거리와 함께 20대 젊은이들의 놀이공간으로 서울 강남에 대적할 만한 강북권의 최신 유행거리로 불린다.
가장 큰 변화는 역시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의 등장. 올 2월 오픈한 ‘로즈버드’를 비롯해 ‘보스턴 킴 커피’ ‘샌드 프레소’ 등 10여곳이 성업중이다. 하루 500여잔을 파는 로즈버드 신촌점은 서울 60여곳의 로즈버드 체인점 중 매출규모로 최상위권.
휴대전화 등 통신기기 판매 전쟁터로 변한 것도 두드러진다. 2년 전 KTF(한국통신프리텔)를 시작으로 LG텔레콤, TTL(SK텔레콤) 판매장이 포진했다. 특히 TTL 매장은 200m 짧은 거리에 무려 3곳이나 들어섰다.
KTF 신촌점 직원 김남두씨(24)는 “하루에도 수천명의 20∼30대 젊은 사람들이 신촌거리를 방문해 휴대전화 등 통신기기 판매량이 다른 매장에 비해 5∼6배 많다”고 말했다.
4층 이상의 빌딩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것도 변화 중 하나. 신촌거리의 약속장소로 유명했던 ‘독수리다방(일명 독다방)’이 8층 건물로 바뀌었고 그 건너편 7층 건물에 피자헛이 들어섰다. 또 신촌거리의 유일한 나이트클럽으로 이 일대 대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하이크라스’는 TGI 프라이데이즈가 대신했다.
미국에 유학갔다가 10년 만에 신촌거리를 찾은 김정훈씨(34)는 “‘오늘의 책’ ‘ㅱ서림’ 등 사회과학 서점과 복사가게가 사라지고 패스트푸드, 커피전문점 등이 대거 들어서 마치 미국의 뉴욕거리를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이호갑·조인직·김현진기자>gd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