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 명물거리,인스턴트 문화에 점령당해

  • 입력 2001년 9월 16일 18시 38분


봉천사거리
봉천사거리
《증권회사에 다니는 서울대 84학번 박모씨(37). 최근 대학친구들을 만나 학창시절 활동무대였던 ‘녹두거리’를 10여년 만에 찾았다. 김치 안주에 투박한 막걸리 잔, 밤새 저항가요를 부르며 젓가락을 두드리던 추억은 생생한데 ‘그때, 그 자리’는 온데간데없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실감났다. 2001년 가을. 녹두거리는 개인적, 일회적 문화의 상징인 패스트푸드, 테이크아웃 전문점이 주류로 떠올랐다. 고려대 앞 ‘참사리길’ 역시 압구정동 로데오거리를 빗댄 ‘고대오 거리’로 불릴 정도로 변했고 강북 최대상권 중 하나인 ‘신촌거리’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변해 버렸다.》

◇ 서울대 녹두거리

서울 관악구 신림9동 서울대 부근. 매캐한 최루탄 냄새 속에서 소주잔을 부딪치며 시국을 논하던 80년대 학번들의 ‘저항의 공간’. 90년대엔 고만고만한 술집과 노래방 등이 활개를 쳐 ‘녹두 베이거스’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젠 ‘녹두’라는 말을 붙이기도 어색하다.

올 봄 문을 연 패스트푸드점 ‘롯데리아’ 뒤편에는 흰색과 검은색 ‘선(禪·Zen)’ 스타일로 깔끔하게 단장한 양주바 겸 호프 ‘마니마니 마니아’가 1주일 전 영업을 시작했다.

힙합, 밀리터리 패션으로 시선을 붙드는 남성복 전문점 ‘체크’도 전 같으면 도시적 이미지로 인기 있는 곳. 노랑머리를 한 김화원 사장(37)은 “평범한 ‘모범생 패션’을 혐오하는 멋쟁이들이 주로 찾는다”고 전했다.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도 녹두거리를 점령했다. ‘로즈버드’가 1년2개월 전 이곳에 맨 먼저 진출한 이후 최근 두세달 사이에 10여곳이나 생겨났다.

녹두거리 일대에 하나밖에 없는 사회과학 서점 ‘그날이 오면’의 주인 김동운씨는 이 같은 변화에 대해 “90년대 중반부터 학생들 사이에 폭넓게 퍼진 개인주의, 쾌락주의와 맞물린 것”이라고 분석.

안정룡씨(24·서울대 미학과 4년)는 “이제 녹두거리의 정체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면서도 “대다수의 학생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서울대생들의 또 다른 문화권인 봉천4거리(일명 ‘봉사리’)도 대변혁을 겪고 있다. 가볍고 빠른 것을 추구하는 학생 고객들의 입맛에 맞춰 최근 1년새 롯데리아, 맥도날드, 스파게티 전문점 ‘소렌토’, 커피전문점 ‘스타벅스’가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지하철 2호선 신림역 앞 신림4거리(일명 ‘신사리’)도 사정은 비슷하다.

◇ 고려대 참사리길

고려대 정경대 후문에서 이공대 캠퍼스에 이르는 거리. 지난해 지하철 6호선 안암역이 개통된 뒤 화려한 상점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있다.

호프나 소주집 대신 어두운 조명과 잔잔한 발라드 음악이 깔리는 ‘바’가 특히 많다. 칵테일이나 외국 맥주, 보드카 등을 마실 수 있는 ‘녹턴’ ‘퓨전’ ‘신라의 달빠’ 등이 인기.

80, 90년대 카페들은 ‘프라우스타’ ‘세리파’ 등 외국계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으로 바뀌었다.

MP3용 백폰을 귀에 끼고 선글라스를 쓴 학생들이 한 손에 커피를 든 채 인라인스케이트로 이곳을 활보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떡볶이나 어묵을 팔던 분식집은 패스트푸드점, 아이스크림 전문점에 자리를 내준 지 오래. 당구장은 PC방으로, 또 요즘 새로이 뜨는 ‘DVD방’으로 전업했다. ‘구치’ ‘샤넬’ ‘프라다’ 등 명품을 파는 안경점도 생겼다.

지하철 개통으로 학생들의 ‘놀이무대’도 넓어졌다.

임형선씨(22·고려대 영문과 3년)는 “지하철로 20∼30분이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압구정동이나 강남역에서 동아리, 동문회 모임을 갖는 친구들도 많다”고 말했다.

‘민족 고대’의 정체성 상실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졸업생인 안제응씨(27)는 “7년 전 화려한 인테리어를 한 카페가 참사리길에 들어선다고 했을 때 학생들이 ‘정서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시위를 벌였던 기억이 새롭다”고 말했다.

고려대 성영신 교수(심리학과)는 “전통과 여유로움을 포용하던 문화는 사라지고 고만고만한 술집과 음식점 등 값싼 ‘키치(kitsch)적’인 상점들만 남았다”며 아쉬워했다.

◇ 연세대 신촌거리

연세대 정문 앞 굴다리에서 지하철 2호선 신촌역까지 300m에 이르는 거리. 홍익대 앞, 이화여대 앞 거리와 함께 20대 젊은이들의 놀이공간으로 서울 강남에 대적할 만한 강북권의 최신 유행거리로 불린다.

가장 큰 변화는 역시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의 등장. 올 2월 오픈한 ‘로즈버드’를 비롯해 ‘보스턴 킴 커피’ ‘샌드 프레소’ 등 10여곳이 성업중이다. 하루 500여잔을 파는 로즈버드 신촌점은 서울 60여곳의 로즈버드 체인점 중 매출규모로 최상위권.

휴대전화 등 통신기기 판매 전쟁터로 변한 것도 두드러진다. 2년 전 KTF(한국통신프리텔)를 시작으로 LG텔레콤, TTL(SK텔레콤) 판매장이 포진했다. 특히 TTL 매장은 200m 짧은 거리에 무려 3곳이나 들어섰다.

KTF 신촌점 직원 김남두씨(24)는 “하루에도 수천명의 20∼30대 젊은 사람들이 신촌거리를 방문해 휴대전화 등 통신기기 판매량이 다른 매장에 비해 5∼6배 많다”고 말했다.

4층 이상의 빌딩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것도 변화 중 하나. 신촌거리의 약속장소로 유명했던 ‘독수리다방(일명 독다방)’이 8층 건물로 바뀌었고 그 건너편 7층 건물에 피자헛이 들어섰다. 또 신촌거리의 유일한 나이트클럽으로 이 일대 대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하이크라스’는 TGI 프라이데이즈가 대신했다.

미국에 유학갔다가 10년 만에 신촌거리를 찾은 김정훈씨(34)는 “‘오늘의 책’ ‘ㅱ서림’ 등 사회과학 서점과 복사가게가 사라지고 패스트푸드, 커피전문점 등이 대거 들어서 마치 미국의 뉴욕거리를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이호갑·조인직·김현진기자>gd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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