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의 시적 성취는 그의 과오를 커버하고도 남는다.”
황동규 시인이 최근 한 인터뷰에서 고(故) 미당 서정주에 대해 입을 열었습니다. 평소 말을 아끼는 황 시인은 계간문예지 <유심> 가을호에 실린 이숭원 교수(서울여대 국문과)와의 대담에서 자신의 소견을 피력한 것이죠. 그는 미당의 공(功)과 과(過)를 분리해서 판단하면서 공(功)에 더 무게를 실었습니다. 그 잣대를 ‘샤머니즘의 윤리관’으로 파악한 것은 다른 평자들과는 다른 면모가 아닌가 싶습니다.
내주 발간될 <유심> 가을호에 실리는 대담중 미당과 관련된 부분만 발췌해 싣습니다…
이숭원=선생님을 <현대문학>에 추천하신 분이 미당 서정주 시인이라고 알고 있는데, 작년에 작고하신 이후 최근에 미당의 시에 대한 논란이 재연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미당의 시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계신지요.
황동규=네. 나는 미당의 과거를 묻지 말자는 건 반대합니다. 미당이 진짜 뛰어난 시인이라면 과거를 감춰서는 안 됩니다. 감출 수가 없는 거지요. 시인에 대한 평가는 관뚜껑을 닫으면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마당에 대해 비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당을 사교의 교주로 만드는 것이지요. 그러나 미당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미당의 시가 나쁘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미당을 폄하는(폄하는 것과 폄하하는 것은 다릅니다.) 사람들이 ‘자화상’, ‘귀촉도’ 같은 시도 안 좋다고 하는데, 나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나는 미당이 샤머니즘의 윤리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샤머니즘의 윤리관은 언제나 이기는 편에 서는 것입니다. 미당이 "왜 친일을 했느냐"는 질문에 "일본이 이길 줄 알고 그랬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빈정대는 대답일 수도 있습니다. 왜 그따위 질문을 하느냐 하는 꾸지람이 섞인 대답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 안에는 진실이 들어있어요. 샤머니즘의 윤리관이 언제나 이기는 편에 선다는 사실을 은연중 드러낸 것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분이 소위 서구의 시민정신이라든가 아니면 불교의 윤리라든가 유교의 윤리, 기독교의 윤리를 갖지 않았고 샤머니즘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황홀한 시를 쓸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분의 언어부터가 상당히 토속적인데, 토속적인 언어와 정서가 바로 샤머니즘에 가까운 것이거든요. 물론 샤머니즘 자체는 아니지만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윤리는 본받을 필요는 없지만 그 때문에 그분의 시까지 다 형편없다고 생각하는 건 지나친 일이 되지요. 어떻게 보면 미당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었지만 미당에게 그런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상당히 중요한 유산 하나를 물려받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숭원=뒷부분에 미당 시에 대한 핵심적 사항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샤머니즘적 윤리관이 문제가 아니라 샤머니즘 때문에 황홀한 시가 나왔다는 말씀 말입니다.
황동규=그렇죠. 미당은 다른 윤리를 가진 사람은 근접할 수 없는 토속적인, 독특한 경지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그분이 샤머니즘의 윤리를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고, 또 그 샤머니즘의 윤리 때문에 미당이 매도당한 만큼, 그가 이룩한 황홀한 시의 경지는 우리가 높이 봐줘야 할 거예요. 예를 들면 ‘상리과원이’라든가 "사발에 냉수도 부셔버리고 빈 그릇만 남겨요"하는 그런 시가 있잖아요? 그런 시는 샤머니즘의 윤리를 가진 미당 아니면 못쓰는 시예요.
이숭원=샤머니즘의 윤리관 즉 샤머니즘이 이기는 편에 선다는 것은 그러니까 제정일치 시대에 무당들이 통치자, 권력자였다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겠지요?
황동규=아니죠. 권력자의 자리에 선 것이 아니라 제정일치 시대 이후 권력자가 하라는대로 한 거죠. 그러니까 이것은 결코 본받을 일은 아니지요. 그것은 분명합니다. 그분의 과거행적에 대해 묻지 말라든가 그래서는 안 되죠. 그 분에 대해 문제가 있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제기해야지요.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시에도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더 문제가 있는 거지요.
(2001년 7월 11일 오전 10시, 황동규 시인 연구실에서)
<정리=윤정훈기자>diga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