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후 유럽의 추상화가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절망감에서 인간 내면의 탐구 결과 나온 것이라면, 한국의 추상화는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좌절하고 고뇌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한국의 추상화는 앙포르멜(비정형) 모노크롬(단색화) 등 외국 추상화 사조의 영향을 받긴 했으나 백의민족 특유의 무채색에 대한 뛰어난 감성과 한국 문인화의 전통을 녹여 독특한 추상 세계를 구축했다. 미술평론가 정병관씨는 “고고한 정신성의 표현이 두드러지면서 색채감각이 검소하고 형태가 단조로운 것은 한국 회화의 전통과 연결된다”고 해석했다.
김환기는 청자와 십장생을 그리는 등 50, 60년대에 구상화로 복귀하기도 했으나 일제시대 말기의 기하학적 추상에서 말년인 70년대의 점묘추상에 이르기까지 격조 있는 동양정신을 추상화에 담았다.
김종영은 브랑쿠지처럼 자연을 요약하고 그 정수만을 남긴 조각품들을 남겼다.
또 유영국씨는 50·60년대의 어둡고 암울한 사회에서도 ‘산’을 모티브로 밝고 힘찬 색채의 기하학적 추상화를 선보였으며, 윤형근은 마포 위에 먹물 같이 검은 갈색을 흠뻑 묻혀 한국적 미니멀리즘의 세계를 개척했다.
서세옥씨는 사람 ‘人’자를 사용해 인간 형상을 표현한 문인 추상화의 경지를 열었고, 물방울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해왔던 김창열씨는 최근 물방울 뒤에 천자문을 배경으로 넣어 다소 개념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만년 전위작가인 박서보씨는 형상을 부정하는 낙서 같은 그림(‘묘법’ 시리즈)을 그려오다 최근에는 종이를 밀어 제작한 작품을 선보이고, 정상화는 독특한 마티에르가 느껴지는 한국적 모노크롬의 세계를 펼친다. 요즘 파리와 도쿄를 오가며 활발한 작품활동을 벌이고 있는 이우환씨는 점과 선이 빚어내는 무한한 공간을 보여준다. 02-734-6111∼3
<윤정국기자>jky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