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씨가 금주 발행되는 월간 「현대문학」 10월호에 발표한 단편 「술 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가 적지않은 파문을 일으킬 듯합니다.
이미 24일자 본지 사회면에 보도한 바처럼 이씨는 이 소설에서 지난 7월 자신을 ‘곡학아세’로 비판한 추미애 민주당 의원과 지난달 명예훼손 혐의로 1억원이 넘는 소송을 제기한 단체 ‘안티조선’ 등에 대해 언급했기 때문이죠. 물론 이것은 분명히 현실을 재가공한 소설이기 때문에 실제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따지는 것은 무익한 일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아무개’라는 이름의 소설가가 최근 ‘세상과 요란한 시비’를 주고받은 뒤 고향의 ‘광려산 글 집’(광산문학관)으로 낙향해 술과 책으로 회한을 달래는 이야기에서 실제의 이씨를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스러진 유림의 자손으로 겪었던 방황과 작가로서 성공을 거두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대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3일밤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도 이씨는 굳이 이 소설이 실제 자신과의 연관성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이 작품은 지난달 이씨가 경북 영양에 한달 가량 머물면서 중국 고전을 탐독하며 쓴 작품입니다. 고사의 우화를 빗댄 이야기 전개 뿐만 아니라 이씨 특유의 유장한 의고체 문장이 주는 글맛이 뛰어납니다. 그것 못지않게 낙향한 한 소설가가 고향에 돌아와서 겪는 인생에 대한 쓸쓸한 회한도 적지 않은 울림을 줍니다. 하지만 세간의 관심은 앞서 말한 선정적인 대목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웅숭 깊은 독자라면 작품 전체를 찬찬이 숙독하신 뒤 그 맥락을 파악하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200자 원고지 120매 분량의 이 소설에서 언론사 세무조사로 촉발된 일련의 사태에 대한 묘사는 채 10장이 안되는 분량입니다. 핵심되는 대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아무개’ 소설가는 고향에 내려와 술과 책으로 세상번사를 잊습니다. 작중 화자는 그가 낙향한 직접적인 계기가 된 ‘세상과 주고받은 요란한 시비’에 대해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 속 깊고 깊은 못은 다 들여다볼 수 없지만, 그 마음이 겉으로 드러난 말이나 움직임은 앞과 뒤를 곰곰이 살피면 반드시 그 까닭을 풀어 알지 못할 것도 없다. 저 사람의 돌아옴도 그러하다. 깊이 모를 그 의식의 밑바닥을 속속들이 헤아려 볼 수는 없으되, 갑작스레 돌아 오게된 몇 가지 계기는 이 언덕 바깥에서 있었던 일들을 찬찬히 더듬어 짚어낼 수 있을 듯도 싶다.
그 중에서도 짚여오는 것은 이 여름 저 사람이 세상과 주고받은 요란한 시비다. 정권을 맡은 신법당(新法黨)과 허영 많은 선의왕(選擬王 * 美利堅 사람들이 처음 대통령제를 만들 때는 '선거로 뽑은 왕'의 개념에 가까웠다고 한다)이 세리(稅吏)를 시켜 이 시대의 언관(言官)들을 굴비두릅 얽듯 얽어 넣었는데, 저 사람이 그걸 참고 보아 넘기지 못한 게 그 발단이었다. 언관이라고 해서 세금을 포탈해도 된다는 법은 없지만, 그 빤한 이치를 내세우고 비위에 거슬리는 언관들을 모조리 잡아넣은 정권의 얄팍한 처사가 역겨워 <언관(言官)없는 조정(朝廷)을 원하나>란 벽서(壁書)를 써 붙이자 큰 소동이 났다.
이어서 ‘이 아무개’ 소설가가 왜 언관의 편을 들었는지에 대한 나름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겉으로는 엄연한 나라의 징세권(徵稅權) 발동을 저 사람이 언로(言路)를 막고 언관을 억누르는 일로 본 데는 연유가 있었다. 이번에 가장 호되게 몰린 언관은 여러 해 전 지금의 선의왕이 재야에 있을 때 그를 위군자(僞君子)로 탄핵하여 크게 시비한 적이 있었고, 근래에도 집권 신법당의 정책을 그때마다 겁 없이 꼬집거나 비아냥거려 왔다. 또 북쪽 붉은 진나라「赤秦=북한」의 참상을 자주 고발하여 폭살(爆殺) 위협을 받은 적도 있는데, 그 이세(二世) 두령과의 화호(和好)를 일통천하(一統天下)의 묘계로만 여기고 있는 신법당 정권에게는 작지 않은 골칫거리였다. 거기다가 전부터 붉은 북쪽에 동조해온 무리들이 이제는 집권세력에 아부를 겸하여 <반 아무개 시민연대>라는 걸 만들고, 그 언관에게 법에 없는 사형(私刑)을 가해오고 있는 중이었으니, 그를 향한 징세권(徵稅權)의 때늦으면서도 갑작스런 발동이 어찌 공변되게 보일 수 있으랴.
하지만 화자는 ‘이 아무개’의 진의가 정치권에 의해 왜곡되어서 ‘엉뚱한 시비’로 번졌다고 봅니다.
하지만 저 사람의 글은 처음부터 오로지 언관들 쪽만을 편든 것은 아니었다. 집권세력과 언관들을 마주보고 달려오는 화차(火車)에 비유하고, 그 충돌의 위험을 먼저 일러준 뒤에, 그래도 정히 싸워야 한다면 언관들을 편들 수밖에 없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집권당과 선의왕을 떠받드는 무리가 벌 떼같이 일어나 저 사람을 몽둥이 질 하듯 몰아세웠다. 대개는 언관도 세금은 내야한다는 빤한 이치의 되풀이였지만, 개중에는 엉뚱한 시비도 있었다.
그 ‘엉뚱한 시비’의 핵심으로 한 여성의원을 지목해 에둘러서 비판합니다. 정치권과 가장 입씨름을 벌일 만한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이를테면 율사(律士)에서 선의왕의 총신(寵臣)이 된 한 여류(女流)는 저 사람을 구법당(舊法黨)으로 잘못 알고 난데없이 곡학아세(曲學阿世)로 몰아세우더니, 일이 잘 안 풀리자 술을 퍼 마시고 아재비 뻘은 되는 저 사람에게 비가당자(非可當者=가당찮은 놈)라며 마구잡이 욕설을 퍼부었다. 또 그러고도 분이 덜 풀렸는지 저 사람이 다른 데에 쓴 글을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터무니없는 혐의를 덮어씌우기도 했다.
개는 저마다 주인을 위해 짖는 법「犬吠其主」이지만, 함부로 짖고 물다가는 주인을 욕보이기도 하는 법. 한 때는 그 주인 신법당과 선의왕을 여지없이 나무람으로써 개 잘못 키운 죄를 물을 궁리도 해보았다.
이어서 ‘이 아무개’가 ‘홍위병’으로 일갈한 유사 시민단체에도 비판의 화살을 돌립니다.
지난 시대 열심히 신법당을 따라 다녔으나 끝내 한 자리 얻지 못하고, 재야에서 이런 저런 운동으로 민의(民意)를 사칭하며 불러 써줄 날만 기다리는 패거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둘만 모여도 무슨 회(會)요, 다섯만 모여도 무슨 운동본부가 되는 것들이 다시 몇 개씩 모여 거창하게 무슨 시민연대라는 걸 꾸미고 연신 성토대회다, 기자회견이다, 하며 저 사람에게 짖어댔다. 그 중에 <반 아무개 시민연대>는 그들이야말로 명예훼손으로 언관 아무개의 소송객체가 되어야할 처지면서도 거꾸로 소송주체가 되어 저 사람을 고소하기까지 했다.
그럴듯하게 싸바르고 치장하는 기술만 일품인 신법당에 홀리거나, 수상쩍기 짝이 없는 '타자(他者)로부터의 신호'에 턱없이 충성스럽기만 한 일부 젊은것들도 벌 떼같이 일어났다. 언제든 홍위병(紅衛兵)이 되어 거리를 내달릴 준비가 되어있는 그들은 먼저 저 사람의 전자(電子)사랑방에 몰려들어 과부하(過負荷)로 대들보가 내려앉을 때까지 별의별 욕설을 다 퍼부었다. 게 중에는 고의적으로 남의 말을 오해하고, 그걸로 저희끼리 찧고 까불다가, 공연히 달아올라 저 사람의 책을 반품하자는 억지스런 운동을 벌인 치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두가 ‘이 아무개’에게는 소모적인 피로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겉으로는 당당하게 맞서면서도 맘 속으로는 인간적인 고뇌가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겼다고는 해도 그 요란스런 한 달은 저 사람에게는 그대로 소모이고 피로였을 것이다. 겪어본 사람은 무리 지어 표현되는 무분별한 악의가 얼마나 억압적이고 파괴적인지를 안다. 악한 자는 그르다 하고 착한 자만 옳다고 하는 사람이 곧 옳은 사람이라는 성인(聖人)의 말씀이 계시기는 하나,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며 독한 소리를 내뱉는 무리를 마주해서 심지(心地) 평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뜻 아니하게 떠맡게 된 언관의 수호자 역할도 적지 아니 곤혹스러웠다. 저 사람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나라의 언로(言路)였지, 언관의 사적인 타락과 부패는 아니었다. 이전의 어떤 대담에서 저 사람은 오히려 아집과 집단이기주의로 권력화 된 언관들을 다음 시대의 식자(識者)들이 가장 힘들여 맞서야할 새로운 종류의 거령(巨靈=리바이어던)으로 예측한 적도 있다. 그런데도 언관의 사적인 부패와 타락을 옹호한 것으로 굳이 몰아대니 답답하고도 울적한 노릇이었다.
그 시비를 통하여 그 동안 물밑으로 갈아 앉아 있던 이 사회의 갈등이 다시 분열의 형태로 솟구치는 걸 보는 일도 괴로웠다. 공방이 거듭되면서 정객과 정객, 언관과 언관이 나뉘어져 싸우고 율사며 승려, 신부, 도사에 심지어는 환경 미화원까지 이 나라 모든 집단이 패를 갈라 싸웠다. 특히 저 사람의 동료인 문사들까지도 찬반을 다투다가 정객들의 대리전(代理戰)으로 치닫는 데에 이르러서는 깊이 상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아무개’는 이런 시비가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음을 떠올립니다.
거기다가 가만히 돌이켜 보면 이 여름의 시비는 결코 낯설고 갑작스런 것이 아니다. 기실 저 사람은 벌써 이 십 년 가까이 이름이나 구실은 달라도 뿌리와 바탕을 같이하는 시비에 시달려 왔다.
이 나라에는 박씨 무인정권 말기부터 지금까지 끌어온 안팎 두 종류의 큰 시비가 있다. 안으로 제도와 체계에 관해서는 신법당과 구법당의 다툼이고, 밖으로 북쪽 붉은 진(秦)나라에 대해서는 합종책(合縱策)과 연횡책(連橫策)의 다툼이다. 그밖에 개혁이 아니라 근원적인 혁명을 주장하거나, 종횡가를 위장한 북의 간세(奸細)가 없는 것은 아니나, 지금 시끄러운 것은 그 두 가지 다툼에 세대차와 지역감정이 끼어들어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이고 구실을 갖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저 사람이 세상에 얼굴을 내민 게 불행히도 그 두 시비가 한창 불붙어 오를 때였다. 박씨 교정별감(敎定別監= 고려 무인정권 시절의 최고위직)이 막장(幕將)의 변심으로 쓰러지고, 새 무인정권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오래 억눌려 왔던 여러 사회적 욕구들이 일시에 분출한 탓이었다. 비록 체육관 선거일 망정 전씨 교정별감이 선의왕(選擬王)으로 옷을 갈아입은 이상, 양(洋)공맹의 왕도(王道) 민주와 자유를 온전히 무시할 수 없었던 것도 그 시비가 공공연히 불붙을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저 사람 원래 그 시비에 무심하려 하였으나 잡글 몇 권 팔아 얻은 것도 이름이라고 세상이 가만히 버려두지 않았다. 동조를 구하다가 거절당한 신법당 연횡책의 무리가 먼저 저 사람을 구법당 합종파으로 몰아세운 게 그 시작이었다. 뒤이은 그들의 적(敵)개념 확대와 강화는 저 사람을 보수반동으로 규정하더니 마침내는 극우 왕당파에 법서사분자(法西斯分子=파시스트)로까지 키웠다.
달구어지고 두들겨 맞아 단련되는 것은 강철만이 아니다. 그들이 체제의 억압과 박해를 통해 단련되었듯이, 저 사람은 그들의 언어적 폭력과 악의에 단련되어 끝내는 이 땅의 동파(東坡=사마광과 더불어 구법당을 영도한 蘇軾)와 소진(蘇秦=합종책의 주창자)을 자처하게 되었다. 여러 해 전 저 사람은 그 과정을 엮어 <보수는 어떻게 단련되는가>란 잡문집(雜文集)을 낸 적도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소설가인 ‘이 아무개’에게는 소모적인 일일 뿐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그 뒤 변해온 세상을 보면 저 사람이 겪어야 했을 피로와 소모는 어떠하였을지 짐작이 간다. 특히 신법당이 정권을 잡고 연횡책을 강행해 온 이 몇 년 그 마음이 받은 상처는 얼마이고 흘린 피는 또 얼마나 될꼬. 따라서 이번의 돌아옴을 보다 깊이 있고 충실하게 풀어볼 수 있는 실마리는 오히려 앞선 그 이 십 년에서 찾아보는 게 옳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소설의 끝은 무엇일까요. ‘이 아무개’는 고향에 은거해 세상의 시비와 멀찍이 떨어졌지만 마음은 무겁습니다. 고향도 그가 돌아가 혼곤한 정신과 몸을 쉴 수 있는 곳은 아니었던가 봅니다. 오기로 대처를 떠나왔지만 부끄러움이 드는 것이죠. 슬며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서 “등뼈가 휘고 머리가 세도록 다투고 우기면서” 살까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쓸쓸한 인생사를 고백한 ‘이 아무개’는 마지막에 이런 말로 결심을 대신합니다.
이 여름 세상과의 한바탕 시비 끝에 고향으로 내려가 몇 달을 지난 일을 비록 남의 얘기하듯 썼으나, 실은 자못 쓸쓸한 내 얘기를 길게 한 셈이니, 자, 이제 다시 술 단지와 잔을 끌어당겨 취하도록 마셔볼까.
<윤정훈 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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