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대학 신입생들은 우리 나라의 어떤 소설에 흥미를 가졌을까. 이 물음을 향해 나는 30여년 동안 그들과 함께 걸었다. 강의실을 가득 메운 신입생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대할 때 느꼈던 그 가슴설렘을 지금도 나는 잘 설명할 수 없지만 그 동안의 강의 내용의 시대적 흐름이랄까 세대적 관심사랄까 그런 것에 대해서는 어느 수준에서 분석될 수가 있다.
이 강의에는 꼭 과제가 주어졌다. 장편소설 10편을 약간의 서지적 해설과 더불어 제시하고 그 중 한 편을 택해 각자의 독후감을 적은 리포트를 제출받는다. 가장 빈도수가 높은 3∼4편을 뽑아 발표를 시킨 다음 토론케 하는 방식이어서 나는 다만 사회자의 처지에 머물곤 했다.
◇ 시대에 따라 쟁점도 바뀐다
70년대 학번의 제일 큰 관심사는 이광수의 ‘무정’(1917년작)이었고, 80년대 학번은 염상섭의 ‘삼대’(1931년작)였고, 90년대 학번의 그것은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1975년작·열림원·2000)이었다.
‘무정’의 쟁점은 작가의 친일문제였고, ‘삼대’의 그것은 중산층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였다. 토론이 두 편으로 갈라지면서 격렬해지기 일쑤여서 사회자의 중립적 처지가 두 편으로부터 집중공격을 받곤 했다.
소록도 병원장으로 현역 조백헌 대령이 부임해서 벌이는 천국만들기의 의욕과 그 실패과정을 그린 ‘당신들의 천국’의 경우는 이와 사정이 조금 달랐다. 어떻게 하면 ‘나’의 천국도 ‘당신들’의 천국도 아닌, ‘우리들’의 천국을 만들 수 있겠느냐에로 토론의 방향이 일제히 향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들의 눈망울이 하도 진지하기에 나는 그들에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1871년작) 속에 나오는 저 유명한 ‘스따브로긴의 고백’장을 읽어보라고 섣불리 권할 수 없었다. 이른바 천국 건설이란 인류가 발명해낸 가장 황당무계한 망상이라는 것, 그럼에도 모든 민족은 이것 없이는 살기는커녕 죽을 수조차 없다는 것을 도스토예프스키가 역설적으로 설파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하는 소설의 의미
그 대신 나는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앞과 뒤에 각각 놓인 다음 두 가지 텍스트를 유의해보라고 당부해 마지않았다. 앞에 놓인 것이 이규태 씨의 논픽션 ‘소록도의 반란’(1966·사상계 발표)이며 뒤에 놓인 것이 인간 조창원 대령(훗날 ‘허허 나이롱 의사, 외길도 제길인걸요’의 저자)이다. 작가 이청준 씨는 전자에 촉발되어 붓을 들었고 후자(인간도 꼭 같이 텍스트이다)의 도움으로 소설을 완성시켰다.
요즘 나는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생각해본다. 소설이란 과연 무엇인가라고. 가장 정밀한 논픽션과 가장 현실적인 인간 모델 사이에 소설이 놓여 있지 않겠는가. 이 세 가지 차원을 동시에 음미할 때 비로소 소설은 스스로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이 아닐까.
김윤식(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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