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8일자 <한겨레신문> 문학면(27면)에 실린 '최재봉 기자의 글마을 통신'에서는 '문학상 거부 통쾌한 파격'이란 제하의 칼럼이 실렸습니다. 여기서는 소설가 최인훈씨가 동아일보가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를 기려 제정한 인촌상을 '거부'했으며, 소설가 공선옥씨는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동인문학상의 심사 대상에 포함되기를 '거부'했다는 내용입니다. 최인훈씨의 사례가 상당수를 차지는 기사 내용중 관련 대목은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인훈씨는, 동아일보의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를 기려 제정된 인촌상을 거부한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우회적으로 들려준 배경과 동기 설명으로부터 그의 생각을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수상 거부에 상식 밖의 이유가 있을 수는 없고, 어디까지나 '공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어떤 문학상을 둘러싸고 모종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내가 그에 대해 뭔가 개인적인 견해를 밝힌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지만, 이번 경우에는 구체적인 내 문제로 다가왔기 때문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지금까지는 두루두루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살아왔지만, 더 이상 그럴 수는 없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에 대해 긍정적인 기대 지평을 지니고 있는 분들이 있다. 이번의 결정을 통해 나는 그분들에게 무언의 말을 한 것이다." 최인훈씨가 말한 '어떤 문학상'은 아마도 조선일보사의 동인문학상일거다.(후략)
이 사건에 대한 기자의 진술과 인용을 사실이라손치더라도, 이에 어떤 진실로 의미를 부여하려는 결론부의 의도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판단입니다.
인촌상과 동인문학상은 각각 5천만원이라는 거액의 상금을 내걸고 있다. 가난한 작가들에게는 만만치않은 유혹이다. 그런 유혹을 뿌리친 작가의 결정은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는 그런 사실을 애써 감추려 하고 있다. 역대 수상자 명단에 파스테르나크와 사르트르의 이름을 명시하고 있는 노벨재단의 의연함과 비교되는 모습이다.
그러니까 이 기사의 취지를 요약하자면, "동아일보는 의연하지 못하게 최인훈씨가 상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않고 애써 감추고 있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저는 이런 사실의 해석이 왜 무리한 진실의 유도인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조선일보의 부분은 제가 내밀한 속사정을 알 수 없으니 어떤 판단을 유예할 수 밖에 없겠습니다).
일단, 최인훈씨가 올해 인촌상 수상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올해는 교육부문(엄규백·양정고등학교 교장) 산업기술부문(강명순·80·한양대 명예교수) 학술부문(이현철·53·연세대 의대 내과교수) 등 3명만이 수상자로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 씨의 경우는 그것이 '거부'(한겨레신문의 표현)인지, 혹은 '고사'인지, 아니면 '사양'(이것은 최씨 본인의 워딩입니다)인지는 해석자의 주관적인 문제이겠지요.
제가 동아일보에서 문학을 담당하고 있지만 저 역시 한겨레 기사를 보고 그런 경과를 알았을 만큼 인촌상은 선정위원들에 의해서 독자적으로 시행됩니다. 일단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 인촌상의 성격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드려야 할 듯합니다. 1987년부터 시행한 이 상은 교육, 산업기술, 언론출판, 문학, 학술, 공공봉사 등 6개 부문에서 큰 업적을 남긴 각계 원로들의 공로를 현양하고자 거액의 상금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학상처럼 등수를 매겨서 최우수 인물을 뽑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상은 인촌상 운영위원회에 참여하는 각계 인사들이 후보자를 추천하고, 운영위원회가 이를 검토해 수상자를 선정합니다. 동아일보사의 이름을 걸고 상금을 지급하기는 하되, 그 선정과정 일체는 신문사와는 무관합니다. 문학 분야 인촌상 운영위원회에는 여석기(위원장, 고려대 국문과 명예교수), 박완서(소설가), 정현종(시인, 연세대 국문과 교수), 이재선(서강대 국문과 교수) 등 4명이 속해있습니다.
문학 분야의 경우, 지금까지의 수상자는 황순원(1987), 박두진(1988) 김성한(1989) 박경리(1990) 박재삼(1991) 윤석중(1992) 최일남(1994) 피천득(1995) 김종길(1996) 김춘수(1988) 박완서(2000)씨 등입니다. 다른 분야에서는 고(故) 함석헌(1987) 선생을 비롯해, 박권상(1991), 오웅진 신부(1987), 이호왕 박사(1987) 등이 상을 받았습니다.
수상자 면면을 보시면 알지만 이 상은 다분히 사회 각계 원로를 예우하는 차원의 '공로상'인 성격이 강합니다. 원래 이런 좋은 취지의 행사는 응당 나랏님께서도 해주셔야 하겠지만 '문민정부'나 '국민의 정부'에서도 어찌된 일인지 이런 분들에 대해서 포상은 쉽게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최인훈씨의 수상 거부/사양의 경과는 무엇일까요. 이 내용은 <한겨레신문> 보도 직후 이 상을 진행하고 있는 사내 담당자를 통해 전말을 파악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인촌상 운영위원회는 9월10일 모임을 갖고 만장일치로 소설가 최인훈씨를 올해 인촌상 수상자로 '내정'('결정'이 아닙니다)했습니다. 이미 최 씨는 이미 지난해에도 한말숙 선생의 추천으로 수상자 후보에 올랐던 인물인데다, 올해 평생 몸담았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정년 퇴임을 계기로 그간의 공적을 대중에게 환기시키자는 취지였다고 합니다. 굳이 이런 명분을 내걸지 않더라도 최 씨 정도의 문단 거목이라면 언제고 '공로상'을 받더라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일일 것입니다.
운영위원회의 결정이 나고 3일 후 사내 담당자가 최 씨에게 전화해서 수락 여부를 타진했습니다. 이 때 최 씨는 "당황스럽습니다. 제가 (상을 받을지) 생각을 좀 해봐야 겠습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후 심사위원장인 여석기 교수와의 통화에서도 최 씨는 역시 "생각해 보겠습니다"는 말만 거듭 전했다고 합니다. 9월18일 담당자가 다시 연락했을 때 최 씨는 "아무리 생각해도 상을 사양해야 겠습니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연유를 물었지만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만 했다는 것이죠. 이틀 뒤인 9월 20일 신문 지상에 수상자를 발표해야 되기 때문에 운영위원들은 "올해 문학부문 수상자 없음"으로 결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사건의 전말은 대략 이러합니다. 형식적으로 엄밀하게 따지자면, 최인훈씨는 수상자로 '내정'되어 수상을 타진한 것이지 대외적으로 '결정'되어 공표된 것은 아닙니다. 노벨상과의 비교는 언뜻 논리의 설득력을 높혀주는 듯하지만 상의 운영과정이 다른 것이라 직접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사료됩니다. 만약 인촌상도 수상자를 먼저 지면을 통해 공식적으로 발표한 뒤에 해당 인물이 수상을 거부했다면 응당 지면을 통해서 이를 알렸겠지요. 만일 그냥 모른척 하고 넘어간다면 명백한 '오보'가 되기 때문이지요. 사정이 이런데도 저희 신문사가 이를 "애써 감추려 하고 있다"는 지적은 분명 사실과 다릅니다.
그리고 저의 사사로운 생각임을 전제한다면, 작가를 포함해 지금까지 인촌상을 수상한 많은 분들이 남들로부터도 '부정적인 기대 지평'을 받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 분들이 "두루두루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살고 계시다고도 믿을 수 없습니다. 이런 수사가, 아니 이런 수사를 동원한 보도가, '작가 줄세우기'과 함께, 무의식적으로 '의식성'이란 미명하에 편가르기를 조장하는 것은 아닐까요. 문학권력에 대해서 만큼은 얼치기에 불과한 '초짜' 문학기자의 객쩍은 생각이었습니다.
<윤정훈 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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