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이 풍경이 눈에 낯설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주 앉은 영국 음반사 매니저에게 말을 걸었다. “우주인 같은 색색의 인형이 나오는 TV프로그램을 아시나요? BBC가 만들었다던데….”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우리 애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그런데 왜요? 아! 저 구릉과 초원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구나!”
그랬다. 그 어린이 프로그램 세트에서 보듯, 낮은 구릉이 한없이 이어지는 ‘영국식 초원’은 이 나라의 풍경에 개성을 부여하는 가장 큰 특징이다. 구릉들 위로 가을빛이 짙어지고 찬바람이 일렁이면 영국인들의 가슴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선율이 바로 민요 ‘푸른 옷소매’(Green sleeves)다.
1929년, 영국 작곡가 본 윌리엄즈는 영국인들에게 우리의 ‘아리랑’ 만큼이나 친근한 이 선율을 오페라 ‘팔스타프’에 등장시켰다. 뒤에 이 곡은 독립된 현악합주곡으로 연주됐다. ‘푸른 옷소매 주제에 의한 환상곡’으로 이름 붙여진 이 곡은 민요를 바탕으로 한 성공적인 편곡의 전형 중 하나다.
플루트와 하프가 짧은 선율을 노래하고 나면, 낮은 현악기가 가만가만히 아이를 잠재우는 듯 느릿한 리듬의 노래를 시작한다. 노래는 높은 현악기와 낮은 현악기를 오가며, 싸늘한 가을바람이 옷깃에 스며들 듯 듣는 이의 마음 속으로 스며든다.
음반은? 그다지 뛰어난 합주기술이 필요한 작품은 아니므로, 웬만한 연주라면 거의 만족할 만하다. 버논 핸들리가 로얄 리버풀 필하모니를 지휘한 ‘본 윌리엄즈 관현악곡집’ (EMI)에서는 ‘토마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 등 그의 다른 주요 작품들을 함께 대할 수 있다. ‘토마스 탈리스…’는 지금 듣기 보다 가을빛이 좀더 짙어지고 첫서리가 내린 뒤의 시간을 위해 아껴두는 것도 좋다.
독일 작곡가 막스 브루흐의 ‘스코틀랜드 환상곡’도 북부 영국의 싸늘한 계절을 마음에 새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브루흐가 본 윌리엄즈의 스승이었던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차가운 바람이 가슴에 스며드는 듯한 독특한 애수를 느낄 수 있는 것은 현악기 선율을 다루는데 남달랐던 스승의 솜씨가 제자에게 대물림 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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