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의 위선과 기만’이란 부제를 단 이 책은 첫머리에서 <이문열과 김용옥 >에서 처형(?)했던 소설가 이문열을 재차 ‘확인 사살’한 뒤, 미당 서정주의 시업을 옹호하는 ‘수구기득권 세력의 자기정당화’, 백낙청 사단의 ‘영문학 패권주의’ , “신문 앞에만 서면 한없이 이성을 잃는다”는 문학평론가 박철화의 ‘이중성’에 대한 비판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그리고 ‘고명철의 김정란 비판에 대한 반론’ ‘남진우 반론에 대한 재반론’ 등 재반론의 글, ‘한국 문단의 추악한 남근주의’ 등의 테마글도 실렸습니다.
지역감정 수구언론 보수논객 등을 맹렬 비판해온 강 교수는 지난해부터 문학권력 논쟁에 발가락을 담그기 시작했습니다. ‘안티조선’ 운동의 ‘정신적’ 동지인 김정란 교수(상지대)가 권성우 교수(동덕여대)와 시인 남진우씨 등 일군의 소장 비평가와 ‘문학권력’ 논쟁을 벌일 때 지원군(?)으로 문학우상 파괴의 성전(聖戰)에 참전한 것이 시작이었죠(혹자는 이를 “김정란 일병 구하기”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습니다만).
저는 문학담당 기자라는 업 때문에 이들의 주장을 허겁지겁 따라다녔던 적이 있었지만, 고명철 윤지관 등 뉴페이스 용병들이 가세하면서 그들의 주장이 차이가 무엇인지, 어떤 쟁점으로 서로를 비판하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을 만큼 무력증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 인물과 사상 > 20호에 실린 강 교수의 반론과 재반론을 보다보니 갑자기 그때의 기억으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합니다. 이런 류의 논쟁은 입씨름 좋아하는 마니아들의 호사가 아닐까… 하는 지극히 사사로운 의심을 하면서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우리나라 문학판이 시대 혹은 시대정신 대표하는 작품은 태부족인데, 이에대한 말만 무성한… 그러니까 작가는 없고 평론가만 난무하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희한한 판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반 독자들의 생각도 이러하신지는 모르겠습니다.)
강 교수는 머리말에서 자신이 왜 문학판을 손 보려고 나섰는지에 대해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머리말은 ‘밑줄긋기’에 전문을 실었습니다).
“문학은 정치에 비해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문학권력’을 문제 심지 않는 건 당연하다고 반론을 펼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학이 아무리 신성하다 해도 그것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점에선 정치와 다를 바 없다. 문인들의 행태가 문학 텍스트에 영향을 미치게끔 돼 있다는 것이다.
한국 문단의 모든 문제들을 문학권력이 책임져야 한다는 건 아니다. 과연 변화의 리더십을 누가 행사해야할 것인가? 그런 관점에서 문학권력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문학의 위기’가 괜한 소리가 아니라면, 그 위기를 타개하려는 노력은 결코 문학권력의 문제를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내부 개혁 없는 외부 개혁은 기대하기 어렵다.”
‘한국 문학의 위선과 기만에 대한 지식인의 고언(苦言)’이란 제하의 보도자료에서도 이런 작의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 문단 일각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문학권력' 논쟁은 문학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문학권력'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문제 삼는 것이 주로 조직과 사람들의 행태에 관한 것임을 생각해보면 이는 한국 사회 전반의 문제와 직결됨을 알 수 있다. 문학잡지 또는 학연을 중심으로 패거리를 만든 '문학권력'이 자기 패거리의 안녕과 번영만을 꾀하는 정치꾼의 행태를 답습하고 있으며 상업주의와 패거리주의에 크게 오염된 신춘문예와 각종 문학상 제도가 문학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건 물론이고, 문학 인구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큰 장애가 되고 있는 게 현실 아니던가. 또한 언론과 공생관계를 맺어온 여러 집단이 언론개혁에 적대적이거나 냉소적인 현실 속에서, 글로 먹고사는 문단이 우리 사회의 언로(言路)를 바로 세우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점은 언론과 문학이 별개의 대상이 아님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인물과 사상 > 제20권이 제기하는 한국 문학 비판은 "자기와 상관도 없는 일에 참견"한다는 반발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저자 강준만은 "지식인이란 지식의 지적 영역에서 쌓은 명성을 가지고 기존의 사회·정치권력을 비판하는 사람"이란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문제의식이 있는 문인들은 문인들에게 통용되는 '스타일'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또 사회과학도들은 문학을 잘 모르기 때문에 감히 개입하려 하지 않는 탓에 문학권력과 문학자본을 정면에서 문제 삼는 책은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는 점을 들어 문단 내부의 개혁을 역설하고 있다. "
글쎄요. 권성우 교수가 문학과지성사의 폐쇄적 에콜리즘을 비판하면서 최초에 발화한 ‘문학권력’ 논쟁이 지금은 전선 없는 이전투구의 양상으로 변질되어버렸고, 문학권력 비판론이 일부 말싸움 좋아하는 호사가의 입씨름으로 머문 ‘그들만의 리그’가 된 것은 아닐런지요.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아마도 저는 이런 호사가들이 제일 싫어하는 ‘냉소주의’에 빠진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류의 ‘호사가’(好詞家)적 비판문을 백번 읽기보다는 소설책을 한 권을 보는 것이 백배 낫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문학담당 기자로서 볼 때도, 이 책에서 화려한 언사로 펼쳐놓은 강 교수의 주장은 상당 부분 설득력이 높아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건의 일부가 강준만 식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 사건이 반드시 그렇다는 ‘진실’과 같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따질 때 강 교수의 주장은 상당부분 진실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에 미치지는 못한다는 것이죠.
또 한가지는, 강 교수가 음험한 권력욕에 사로잡힌 (저를 비롯한) 언론권력과 각종 문학권력 섹터들의 지능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문학 분야의 가장 중요한 축이라 할 수 있는 문학수용자, 즉 독자의 목소리가 실린 자리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죠. 저는 강 교수의 인식처럼 문학판이 고차원적 협잡이 이뤄지는 정치판과 같은 곳일 수 있는 의심을 합니다만, 그러나 독자들이 순진무구해서 이런 정황을 모르는채 그들이 좋다는 작품을 무조건 추종한다고 믿음을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만약 강 교수가 제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 비판했다면 저 역시 그의 선명하고 도발적인 글쓰기에 환호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서, 강 교수의 작업에 대해 더욱 시니컬한 감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저 역시 ‘문학권력’의 일부인 보수기득권 세력이기 때문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요.
고백하건데, 한때 저 역시 강 교수의 오랜 팬이었습니다. 성역과 금기에 도전한다는 캐치프레이즈가 뜨거운 가슴에 큰 울림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근 한 후배의 말처럼 저도 “이제는 물린다”는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그러나 오해 없으시길. 저는 강 교수가 말하는 “성역과 금기에 대한 도전”이란 대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의 사실을 진실로 몰아붙이는 강준만식 비판론이 보여주는 매너리즘과 자기복제 혐의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최근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강 교수는 자기가 만들어둔 ‘인물파일’(각종 지상에 나온 칼럼이나 주장을 인물별로 분류해 모아놓은 것)이 8000개나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런 자신의 불굴의 노력에 대해서 “난 운동을 하려는 게 아니라, 지식인의 추한 몰골을 응징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그와 한겨레신문의 내밀한 관계를 ‘학언유착(學言癒着)’이라고 단언하고, 그 증거로서 강 교수가 얼마나 한겨레신문에 많이 등장했는지, 한겨레신문이 얼마나 그의 책과 업적을 칭송했는지 시시콜콜하게 늘어놓는다면?… 그래서 강 교수는-김정란씨가 조선일보와 이문열의 관계를 비판하면서 드는 논거대로-“언론이 키워줬다”고 주장한다면?… 그래서 강준만조차도 성역이나 금기가 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면?… 생각만으로도 유쾌한(?) 상상입니다.)
하지만 방대한 자료를 축적한 그의 성실성 만큼은 높게 평가되어져할 자세이지만, 이제는 강 교수도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근 ‘미국 대외정책의 저격수’인 노엄 촘스키의 신작 < 불량국가 > 보면서 느낀 것입니다만, 강 교수는 이제 촘스키의 전술을 배워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날선 주의나 주장은 전혀 하지않으면서 오직 방대하게 취합한 사실(fact)을 논리적으로 배열하는 것으로서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진실’에 눈뜨게 되는 방식 말입니다.
강 교수도 이 점을 의식하고 있지만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는 듯합니다. 강 교수는 앞서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보고 ‘신문쪼가리나 보고 글쓰는 사람’이라고 폄하하는 걸 알고 있다. 나 그런 사람 맞다. 왜 그러느냐. 심오한 학술논문은 몇 백명 밖에 안 읽지만, 신문 칼럼은 몇 십만명이 읽는다. 난 이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달에 한권꼴로 책을 쓰는 지적 물량공세는 이제는 더 이상 미덕이 될 수 없습니다. 양보다는 질이 중요한 때가 아닌가 합니다. 이런 노력이 강 교수 개인의 학자적 업적을 공고하게 만드는 일임을 물론이고, 나아가 한 사회의 양심을 지탱시키는 진정한 ‘생산적 담론’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자기복제’의 혐의(사람들이 “신물난다”고 일갈하는)에 자기 발목을 잡히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강 교수는 조만간 발간할 < 인물과 사상 > 21호에서 “한국 문학판이 어떻게 짜여져 있는지 분석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겨레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이미 최근 문학관련 서적과 잡지 300만원 어치를 샀다고 합니다. 어떤 이야기가 될 지 벌써부터 눈에 선한 것은 비단 저 혼자만의 착각일까요.
►다음은 < 인물과 사상 > 20호의 주요 내용입니다. 출판사가 제공한 자료를 가감 없이 그대로 싣습니다.
이문열은 한국 문학의 '리트머스 시험지'
한국 문학산업의 왜곡된 '스타시스템'의 정점에 서 있는 이문열은 한국 문학의 모든 모순을 구현하고 있는 상징이자 실체이다. 한국 문단에서 보기 드물게 돈과 명예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이문열의 이념적 성향이 문제가 아니라 이문열과 문학자본 및 유력 언론과의 유착이 만든 스타시스템,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는 그의 탁월한 처세술이 한국 문단의 어두운 측면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이문열은 단순히 그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시의적절하게 언론을 이용하는 언론플레이, 첨예한 이슈마다 한 방 터뜨려 논쟁을 만들어내는 능력 등 '이문열 거품' 현상에 기인한 바 크다. 이와 같은 '이문열 거품'은 "설치는 여자들에게 한마디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썼다"는 < 선택 >의 성공이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문열 문학의 '교양주의'와 '반지성주의'의 아이러니컬한 결합이 '지식폭력'이 되는 현실, 곡학아세를 낳은 이문열의 오만과 오기 등을 문학사회학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미당 서정주를 이용하는 사람들
중앙일보의 미당문학상 제정을 계기로 가열된 미당 평가에 숨어 있는 정치적 의도는 무엇인가? 해방 이후 한국 문단을 지배해온 삶과 문학을 분리해보자는 '분리주의적 문학관'을 주장하는 문학인들이 그의 친일·친독재 경력에도 불구하고 미당을 옹호하고 미당 문학상을 통해 정치적으로 미당을 복권시키고자 하는 것은 시대정신의 부패는 물론, 자신들의 보수주의적 삶 또는 세상에 대해 닫힌 삶에 대한 정당화를 서정주 옹호를 통해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백낙청 사단'과 '영문학 패권주의'에 대한 의혹
백 년도 넘은 한물 간 영국의 문학평론가 아널드를 되살리기 위해 애쓰는 '백낙청 사단'의 움직임은 진보적 문학관을 주창해온 그간의 활동 내용과 너무 걸맞지 않다. 단순히 '옛 인물 다시 보기'의 차원으로 보기 힘든 집요한 영문학 살리기의 배경엔 영문학 패권주의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의혹을 제기하고 자타가 진보적·양심적 지식인으로 공인하는 백낙청 교수가 자신과 연루된 최근의 문학권력·언론개혁 논쟁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간곡하게 그의 답변을 촉구하고 있다.
고명철의 김정란 비판에 대한 반론
문학 내부의 치부에 대해 날카롭고 진보적인 안목을 가진 문인들조차 김정란의 타당한 문제제기를 백안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감히 진보도 아닌 주제에 상업주의적(?) 언론에 의해 진보 대접을 받기 때문인가? 아니면 자신이 속한 문학 집단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내부 고발'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인가? 문학평론가 고명철의 김정란 비판을 계기로 문단을 지배하고 있는 뿌리깊은 남근주의와 허명화된 진보 진영에 대한 문제제기, 언론의 횡포에 무기력한 대응으로 일관하는 한국 문단의 허약성을 비판한다.
남진우의 반론에 답한다
화려한 스타일리스트로 알려진 시인 남진우의 김정란·강준만 비판과 논쟁에 대한 재비판. 텍스트의 메시지를 우선시하는 글쓰기를 혐오한 나머지 현실을 떠나 몽상과 신비의 세계에 집착하고 스타일에만 몰두하는 현실 도피적 문학관, '텍스트 숭배주의'에 빠져 '현실 계몽주의'적 글쓰기를 혐오하는 태도는 마치 한손으론 릴케 시집을 읽고 눈물 흘리며 다른 한손으론 유대인 학살을 집행한 나치 장교의 예화를 떠올리게 한다.
문학평론가 윤지관의 비판에 답한다
현실적으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추상적 담론만 되풀이하고 그 결과 진보와 실천이 구호와 주문으로만 존재하는 살롱 좌파의 관념성을 문학평론가 윤지관을 통해 살펴본다. 단지 자본주의 질서를 대체할 전망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극우와의 싸움에서 자유주의자들과 공동 투쟁을 벌이기보다 자유주의자 비판에 몰두한 결과, 오히려 이문열과 같은 사람이 한국 문단을 지배할 수 있는 터밭을 만들어준 게 아니냐는 반박이다.
문학평론가 박철화의 이중성
문학 내부의 문제에 대해선 날카롭고 진보적인 안목을 갖고 있는 문인들도 신문 앞에만 서면 이성을 잃고 수구신문 옹호에 급급하다. 공지영·은희경·신경숙과 관련해 '작품-출판-언론-광고'의 아름답지 못한 커넥션 문제를 제기했던 문학평론가 박철화, 신문에 대해선 "어떤 신문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면 거기에는 그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렇다면 왜 그 세 작가의 소설이 많이 팔리는 건 그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보지 못하는가. 이런 일관성 상실은 그의 수구신문 옹호 논리의 허구성과 이중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데 불과할 것이다.
한국 문단의 추악한 남근주의
"자네 오늘 밤 나한테 수청 들지 않겠나?"라는 말을 남자 시인이 여성 문인 지망생에게 공공연히 할 수 있는, 한국 문단을 지배하는 남근주의에 대한 문제제기. 최소한의 도덕적·법적 의무를 작가적 호방함이나 예술가적 낭만주의로 포장하는 문학 신비주의가 바로 남근주의를 부추기고 온존시키는 주범임을 밝히고 있다.
학력과 학벌은 계급이다
미국 아이비리그 출신들의 주요 요직 점유율이 20%에도 못 미치는 반면 서울대·연고대 출신들은 60% 이상을 점하고 있는 한국의 학벌 카스트 제도. 점점 더 미쳐 돌아가는 학벌 문제와 교육 시스템에 대해 침묵하는 지식인들, 자기 밥그릇 지키기에만 몰두하는 그들이야말로 학벌 계급의 가장 큰 수혜자들임을 살펴본다.
<윤정훈 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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