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보 기자의 반집&한집]이창호-창하오 실수도
'장군멍군'

  • 입력 2001년 11월 11일 18시 34분


기사들마다 기풍이 다르듯 바둑돌을 놓는 품새도 사뭇 다르다. 크게 나누면 조훈현 9단 스타일과 이창호 9단 스타일 등 두가지가 있다.

조 9단 스타일은 조금 부산스럽다. 바둑돌을 들고 바둑통과 바둑판 위를 왔다갔다 할 때가 많다. 특히 바둑이 유리해지면 그 빈도와 강도가 심해지고 바둑돌 놓을 때도 ‘딱’ 소리가 나게 놓는다. 바둑돌 놓는 품새만 봐도 형세의 유불리를 알 수 있다. 조 9단의 대표적인 후계자가 이세돌 3단.

이에 비해 이 9단 스타일은 정확하고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다. 마지막 초읽기에 몰려도 바둑돌을 집어 한번에 조용히 내려놓는다.

6일 이창호 9단(흑)과 중국의 창하오(常昊) 9단이 맞붙은 제6회 삼성화재배 4강전 3번기 1국. 반집을 다투는 미세한 형세인데다 두 대국자 모두 마지막 1분 초읽기에 몰린 상황.

그런데 이 9단 바둑을 수십판 보아온 기자로서는 처음 보는 광경이 연출됐다. 이 9단의 손길이 조 9단처럼 바둑판 위를 몇차례 왔다갔다 하다가 돌을 놓는 게 아닌가. 장면 1도의 흑 1이 그것. 이어 ‘가’에 치중해 빅을 만들려는 듯 손길이 좌변으로 향하다가 급히 중앙으로 돌아가더니 흑 3. 그렇다면 흑 1은 명백히 한집 이상 손해.

좌하귀에서 흑 ‘나’, 백 ‘다’, 흑 ‘라’로 한집 이득보는 수순을 놓친 것은 그렇다고 해도 흑 1의 손해는 치명타였다. 창 9단의 극적인 역전 반집승.

김성룡 7단은 “아마 이 9단이 반집 승부에서 이같은 실수를 해서 반집을 진 것은 기사 생활한 이래 처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검토실에서 대국을 지켜보던 이 9단의 동생 이영호씨(25)도 “이런 어처구니 없는 수를 두는 걸 보니 형이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닌 것 같다”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주변에선 한국기원 상임이사회가 이 9단의 중국 리그 진출을 막은 것에 대한 심적 부담감 때문에 이 9단의 집중력이 떨어진 것이 아니냐고 수근거렸다.

다음 날 열린 2국. 초반부터 창 9단이 앞서나가 한국 검토진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창 9단이 우상귀에서 무리하게 패를 내다가 순식간에 형세가 역전됐다. 물론 큰 차이는 아니지만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 것.

장면 2도. 창 9단이 둔 흑 1이 검토실을 놀라게 했다. 팻감으로 쓴 것이긴 하지만 백 4로 장문쳐 잡는 수가 있기 때문에 큰 손해. 창 9단은 국후 “축이 안된다는 것만 생각하고 장문을 깜빡했다”고 고백했다. 이 실수로 형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이 9단이 200수만에 불계승. 전날 창 9단이 그랬듯이 이 9단으로선 행운이었다.

1, 2국에서 서로 ‘장군멍군’의 실수를 주고 받았지만 이 9단의 컨디션이 훨씬 좋지 않았다. 9일 열린 최종국에서 이 9단은 난조를 보인 끝에 불계패했다.

<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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