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해 우리 모두가 가슴에 새겨두고 지낼만한 말씀을 들려주십시오”라고 청하자 스님은 “우리 모두 부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에 서로 ‘가난을 나눠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아울러 하나의 씨앗도 사계절의 기다림 끝에 열매를 맺듯이 우리들도 ‘매사 기다리고 뜸을 들이면서, 넘치기 보다는 다소 부족한 듯’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생각합니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님께서는 올해 칠순이 되셨습니다. 새해를 맞는 기원과 소망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군요. 출가 이후에는 한번도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지내왔는데…. 1954년 집을 나와 산문(山門)에 들어섰으니 절에서 산 지가 올해로 마흔 여덟해입니다. 평소에는 육체적 나이에 관심이 없었는데 요즘은 조금씩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됩니다. 그때 마다 ‘내 나이 분수’에 맞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지요. 또 내 글을 읽고 나에게 조그마한 기대를 걸고 살아가는 분들을 실망시켜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할 수만 있다면 출가후 여러분들에게 진 마음의 빚과 시주의 은혜를 조금씩이나마 갚아나가고 싶습니다.”
-지난 한해는 테러와 비리 갈등으로 얼룩진 한 해였습니다. ‘9.11테러’ 직후에는 미국 뉴욕 불광사의 수계법회에 가셨다가 테러 현장을 직접 둘러 보기도 하셨는데요….
“공교롭게도 테러 발생후 49일째 되는 날에 수계법회가 있었습니다. 법회를 갖기 전에 참석자들과 함께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지요. 테러 현장을 방문했을 때는 수천명의 무고한 희생자가 숨진 곳이 ‘관광명소’가 되어가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어요. 또 인류가 이제는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나누는 일’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굶어죽는 어린이가 하루 평균 3만5000명에 이르고, 10억명 이상의 인구가 미화 1달러로 하루를 연명하고 있는데 미국에서 생산된 농작물의 80%가 동물사료로 쓰이고 있다는 충격적인 얘기도 들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인류가 싸움을 멈출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웃의 어려움을 보살피는 자비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테러와의 전쟁’은 미국의 교만이 원인이라는 이들도 있고 아랍에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충돌로 확대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느 한 쪽의 문제 만은 아닐 것입니다. 미국이 테러 용의자를 잡겠다며 무고한 민간인들을 희생시키거나 한 나라를 초토화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행위입니다. 미국은 자국 지식인의 양심적이고 의로운 목소리를 경청해 테러의 구조적 원인을 성찰해야 합니다. 아랍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적 극단주의나 여성에 대한 차별은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신의 전사(戰士)’는 자기와 싸워 이기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 남과 싸워 이기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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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지방선거와 월드컵, 그리고 대통령선거가 열립니다. 국가적 ‘선택’과 국제적 ‘축제’를 어떻게 치러야 할지 지혜를 주십시오.
“월드컵은 우리 국민의 역량과 손님맞이 전통에 비추어 88 서울올림픽처럼 성공리에 치러질 것으로 봅니다. 월드컵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통령선거인데 예전처럼 온갖 추악한 싸움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치 지도자와 그의 참모들이 합심해서 모든 국민이 기뻐하고 승복할 수 있는 한 판 승부를 펼치고, 이를 통해 국민들이 대한민국에 대한 긍지와 애정을 갖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동아일보는 올해 어젠다(Agenda·의제)로 ‘페어 플레이(Fair Play)’를 정했습니다. 이를 잘 실천해 나갈 수 있는 방안을 일러주십시오.
“‘페어 플레이’가 없는 승리는 또다른 화를 불러온다는 것을 모든 이들이 알아야합니다. 지난해 동아일보 사주와 기자들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은 고통을 받으신데 대해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하지만 이제 개인적인 원한과 사적인 감정은 모두 묻어버리고, 인촌(仁村)과 일민(一民) 등 선대(先代) 발행인들과 선배 기자들이 일제와 독재정권에 맞설 때의 기개와 고통을 기억하면서 새해에는 보다 순수하고 겸손하게 언론 본연의 의무를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현 정부가 출범할 즈음 ‘지역갈등의 최대 피해자이면서 수혜자이기도 했던 김대중 대통령이 임기중 지역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면 이 한가지만으로도 역사에 남을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요지의 기고문을 동아일보에 실으셨던 기억이 납니다. 임기를 1년 남긴 현 정부에 한말씀 해주십시오.
“‘국민의 정부’에 나름대로 기대를 걸었던 사람으로서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대통령께서 취임 당시의 초심(初心)과 고통받던 야당시절 다짐했던 일들을 잘 돌이켜 보셔서 임기후에라도 ‘과(過)’도 많았지만 ‘공(功)’도 많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대통령에 뜻을 두신 분들도 자신의 집권 후를 생각해 서로간에 좋은 ‘인과(因果)관계’를 맺는 것이 지혜의 정치입니다.”
-오랫동안 글을 쓰시지 않고 있으십니다. 다시 독자들과 만날 계획은 없으신가요.
“몇년 째 제가 관여하는 ‘맑고 향기롭게’ 소식지 외에는 ‘글 빚’을 지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이 너무 시끄럽고 어수선해 제 말과 글을 보태는 것이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 같아 그럽니다. 요즘 세상에는 좋은 책과 사상, 훌륭한 말과 글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 내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밖’ 보다는 ‘안’을 들여다 보면서 ‘영혼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올 한해 우리 모두가 가슴에 새겨두고 지낼만한 말씀을 들려주십시오.
“우리 모두 부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에 서로 ‘가난을 나눠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아울러 하나의 씨앗도 사계절의 기다림 끝에 열매를 맺듯이 우리들도 ‘매사 기다리고 뜸을 들이면서, 넘치기 보다는 다소 부족한 듯’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생각합니다.”
-강원도 산골 오두막 스님의 거처에는 지금 눈이 많이 내렸겠습니다.
“예. 사방 10리 인적이 없는 곳에서 홀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한 겨울에는 좀 연락이 닿을만한 곳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상좌들의 바램이 있지만 저는 오랫동안 그런 생활을 해와서 그런지 별다른 불편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운동 삼아 한번에 40, 50분 가량 나무를 패곤 했는데 요즘은 20, 30분하곤 힘을 아껴요. 힘을 다 소진해 버리면 피로를 회복할 수 없다는 ‘삶의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자신의 욕심 가운데 60∼70%만 성취하는 삶을 살고 나머지는 ‘여백’으로 남겨야 합니다. 대관령에서 50년간 한 트럭을 몰고 다닌 이가 ‘오르막길에서 엑셀을 잔뜩 밟지 않은 것이 차를 오래 쓰는 비결’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느낀 것이 많습니다. 우리들 삶과 인생도 그럴 것입니다. 아이들도 ‘다소 부족한 듯’ 기르는 것이 올바른 보살핌 입니다.”
스님은 요즘 산중 등잔불 아래에서 류시화가 옮긴 ‘달라이라마의 행복론’(김영사)과 최근 개정판이 나온 마하트마 간디의 ‘날마다 한 생각’(호미출판사)을 읽고 있다. 이따금 나들이를 다녀오면서 차안에서 뉴에이지 음악가 야니의 음악도 즐겨 듣는다.
지난해 스님은 미국 방문길에 자연주의 사상가 헨리 소로가 살았던 메사추세츠주 근교 월든 호반을 찾아갔었다. 소로는 하버드대를 나와 부와 명성을 쫓지않고 자연과 더불어 일생을 보낸 인물. 스님은 기자에게 소로우의 말 한마디를 들려주고 총총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제발 바라건대 그대의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일 것이며, 백 가지나 천 가지가 되도록 하지 말라. 자신의 인생을 단순하게 살면 살수록 우주의 법칙은 더욱 더 명료해질 것이다. 그 때 비로소 고독은 고독이 아니고 가난도 가난이 아니게 된다. 그대의 삶을 간소화 하고, 간소화 하라!”
<오명철기자>osc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