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교육 현장에서 그들의 정성에 주어지는 대접은 잘 해야 개밥의 도토리 혹은 찬밥 대접이다. 고등학교에 가면 교과서에 실린 몇 편의 시들을 대학입시와 관련해서 기계적으로 암기하게 하거나 공식화된 질문에 맞춰 ‘정답’ 훈련을 시키는 것이 전부다. 교육이 ‘개밥’된 마당에 시 교육이 그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된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시 교육은 정답을 거부하는 상상력 교육이다. 그것은 기계적 암기교육에 저항하는 창의성 훈련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향해 가슴을 열게 하는 감성교육이다. 인간의 차가운 마비를 방지하는 최선의 대책이라는 점에서 시 교육은 인성교육의 핵심 중에서도 핵심이다. 창의력과 상상력을 길러주는 교육, 인성과 감성 함양의 교육이 필요하다는 소리들은 그저 소리로만 요란할 뿐 정작 교육은 거꾸로 가고 있다.
이 뒤집어진 교육으로부터의 결손을 메우기 위해서는 학부모들이 깨치고 나서서 자녀들에게 시를 읽히는 길밖에 없다. 그럴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는 모르지만.
“차오르는 몸이 무거웠던지/ 새벽녘 능선 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다// 神(신)도 이렇게 들키는 때가 있으니!” 시인 나희덕의 금년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에 실린 어떤 시의 첫머리 3행이다. 이 시에는 ‘上弦(상현)’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상현이라면 만월을 향해 차오르는 달이다. 능선에 걸린 상현달에서 잉태한 여신을 보는 눈, 그 달의 여신이 능선에 앉아 잠시 쉬다가 인간의 눈에 들킨다는 상상의 확장-이것은 놀라운 감성이고 상상력이며 언어 예술만이 성취할 수 있는 이미지 형상화이다.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때로 그녀도 발에 흙을 묻힌다는 것을/ 외딴 산모퉁이를 돌며 나는 훔쳐보았던 것인데/ 어느새 눈치를 챘는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구름 사이 사라졌다가/ 다시 저만치 가고 있다// 그녀가 앉았던 궁둥이 흔적이/ 저 능선 위에는 아직 남아 있을 것이어서/ 능선 근처 나무들은 환한 상처를 지녔을 것이다/ 뜨거운 숯불에 입술을 씻었던 이사야처럼.”
인간이 죽을 때까지 써야 하는 것이 언어다. 시의 언어는 비유, 상징, 알레고리, 반어, 역설, 모순형용 등등의 방법으로 창조력을 키우고 상상력을 확대하고 의미의 비옥한 잉여가치들을 생산한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 것 이상의 세계로 확장시켜 의미의 풍요화를 달성하는 것이 은유, 상징, 알레고리, 반어, 역설 같은 언어적 발견의 기술들이다. 상상력이 ‘의미의 풍요한 확장’이라면, 그 확장의 기술은 문학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창조행위의 기본 요청이고 ‘창조’를 말하는 인간의 필수 장비이다.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