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검을 죽음으로 막아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내용이었다. 과연 그럴까? 죽음과 주검이 혐오의 대상이라면 삶은 또한 그 얼마나 혐오스러울 것인가. 요컨대 그들의 주장은 추모공원의 필요성은 인정하되 우리 동네는 안 된다는 것이고, 그 이유는 물론 땅값 하락이라는 돈에 있었을 것이다.
돈 때문에 죽음을 거부하는 삶은 결국 생활 자체를 심각한 돈 위주의 사회로 만들어버리고 말 것이 분명한 사실 아닌가. 정중히 모셔져야 할 시신이 고층 아파트 크레인에 매달려 내려오고 주검을 앞에 놓고 후손들이 유산 싸움을 벌이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중이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김열규 지음·궁리)는 맨살에 찬물을 끼얹는 충격이다. 풍수를 공부하면서 무수히 많은 무덤들을 접해왔지만 어느 사이엔가 나 자신 죽음을 잊고 있었던 탓이다. 죽음이 있으므로 삶이 의미 있어진다는 역설은 거부하기 힘든 주장이다. 그러니까 죽음이 불안으로 남아있는 동안 삶 또한 불안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개성없는 삶이 개성없는 죽음을 낳는다거나, 우리는 지금 죽음의 몰개성 시대를 살고 있다는 발언 또한 거부할 수 없게 된다. 리무진 장의차를 도입하고 검은 양복에 흰색 완장을 두른다고 죽음의 몰개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화장 또한 일종의 주검에 대한 모욕이나 유기라고 생각하는 습성이다. 이는 매장된 시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부식되어 가는지를 단 한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인정하지 않을 일이다. 그 끔찍한 광경에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자식들이 있을 정도이다.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는 것 역시 산 사람들의 생각에서일 뿐이다. 죽음 뒤의 일은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죽음’이나 ‘너의 죽음’은 존재하지만 ‘나의 죽음’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죽음이란 검증 가능한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헤겔의 말처럼 죽음을 두려워 하고 그 피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참아 견디고 그 속에서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 정신의 생명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그 대답을 작가 최명희의 ‘혼불’의 후반 한 구절에서 얻고자 한다. 아마도 작가는 그때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표현은 더욱 애잔하고 절실하다. “작전이 필요할 때 작전을 세우면 이미 너무 늦다. 꽃이 필요한 순간에 꽃씨를 뿌리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꿈을 가진 사람은 훗날을 도모하기 위하여 땅 속에 미리 씨앗들을, 버리듯이 묻어놓아야 한다.” 마치 삶 속에 죽음을 버리듯이 묻어놓고 살아가는 것처럼.
최창조(풍수학자·경산대 풍수학과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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