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일기]건넌방 아저씨

  • 입력 2002년 1월 10일 14시 17분


오늘 아침 출근길에 마루에 놓여진 김 선물상자를 보았다.

엄마에게 누가 가져온 거냐고 물으니 ‘건넌방 아저씨’란다. 건넌방 아저씨….

내가 고등학생 때 방 하나를 세주었고 그 방에는 30대 미싱사 부부와 노모가 세를 들었다. 그 집 부부는 결혼 8년이 지나도록 애가 없어 고민인 그러나 금실만큼은 어린 내가 봐도 대단한 부부였다. 아줌마는 애를 가지려면 튼튼해야 한다고 아침마다 집 앞 학교 운동장을 몇바퀴나 돌고오곤 했고 노모는 구부러진 허리로 저녁에 늦게 돌아오는 아들 부부를 위해 힘들게 집안 일을 했다.

1년인가 살고 교회 아래 방 두 개짜리로 이사간다고 해서 너무 잘 되었다며 서로 기뻐하며 헤어진 사람들…. 몇 년인가가 흐르고 엄마는 시장에서 그 할머니를 만났다며 미싱사 부부의 이혼 얘기를 전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르고 작년 여름. 저녁 산책길에 저쪽에서 애를 무동 태우고 오는 남자와 그 옆에서 애 발을 붙잡고 웃는 여자 세 가족이 보였다. 저녁 먹고 바람 쐬러 나온 가족들이려니 하며 지나치는데 이상하게 그 남자는 자꾸 뒤를 돌아보고 돌아보고 했다. 집에 돌아오며 엄마가 그랬다. 그 미싱사 아저씨였다고. 애 있는 여자랑 재혼했다더니 그 여자랑 아이인가보다고.

그러고는 그 아저씨를 못봤는데 어제 저녁 갑자기 아저씨가 집엘 찾아온 것이다. 김 선물을 들고 새해 잘 맞이하시라고. 지금은 먼동네서 사는데 그냥 이 동네 예전 살던 집이 생각나더라고. 그러면서 살던 방을 보고 갔으면 좋겠다고. 한참을 그 방을 보고 갔다고 한다.

김을 보면서 그 아저씨한텐 그 방에서 살던 때가 혹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줌마와 헤어지기 전까지, 노모를 위해 방을 내주고 다락을 개조해 부부가 좁게 함께 누웠던 날들이, 김장을 하기에는 부엌이 좁아 우리집 부엌을 빌려김장을 하던 그날들이 혹시 가장 아름다운 날들이 아니었을까….

강석란(카피라이터·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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