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권은 ‘학원 명문 타운’의 차원을 넘어 이제 새로운 문화와 생활 코드로 자리잡고 있다. 대치권의 개념과 상징을 바꿔놓은 것이 삼성타워팰리스다.
국내 최고의 아파트로 꼽히는 타워팰리스의 1차 입주자는 850명. 직업으로 보면 대기업 및 금융회사 고위직 임원이 490세대로 가장 많다. 다음으로 △의료계 100세대 △기업체 사장 100세대 △법조계와 전문직 70세대 △교수 60세대다. 정계인사와 연예인은 12세대에 불과하다.
삼성그룹은 타워팰리스의 분양 광고를 내는 대신 계열사 고객 데이터베이스 등을 이용해 5만명에게 분양 안내문을 보냈다. 입주자들은 ‘초대장’을 받은 사람 중에서 폐쇄적으로 결정됐다. 경쟁률 3대 1. 타워팰리스Ⅰ,Ⅱ,Ⅲ은 99년부터 지난해까지 3차례에 걸쳐 3036세대의 분양이 끝났다.
최종선발 과정에서 사전 ‘물 관리’가 이뤄졌다. 삼성물산 유광석전무는 “신뢰할만한 전문직이면서 ‘함께 어울려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기준으로 했다”며 “입주자에 대한 의료, 레저, 편의서비스까지 삼성서울병원 등 삼성 계열사가 관리한다”고 말했다. ‘위험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정치인과 연예인은 극소수로 제한됐다.
70년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돈만 있으면 입주가 가능했지만 타워팰리스의 경우 비슷한 부류가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는 ‘서구식 상류사회(High Society Village)’를 지향하도록 사전 조율됐다. 서울시립대 조경진교수(건축도시조경학부)는 “타워팰리스가 포함된 대치 지역과 이전 부촌의 핵심적인 차이는 대치권이 ‘커뮤니티’라는 점”이라고 분석한다.
타워팰리스 신축으로 ‘MGM(Members Get Members:비슷한 부류가 비슷한 고객을 몰고 온다)’ 효과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이곳에 입주할 친구나 직장동료의 얘기를 듣고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분양이 마무리 된 지 6개월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타워팰리스 분양 사무실에는 ‘웃돈’을 줄테니 들어갈 수 없느냐는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일부 고객은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에 전화를 걸어 “미리 돈을 송금해줄테니 무조건 하나를 잡아달라”는 경우도 있어 부동산업자들이 “그렇게는 안된다”며 말리는 웃지못할 일도 빚어진다.
금융자본의 이동도 시작됐다. 15일 동부생명과 동부화재가 새 사옥인 동부금융센터로 이전한다. 뒤 이어 푸르덴셜생명, 삼성생명, 현대해상, 교보생명 등도 사옥 이전을 서두르고 있다.
이 지역의 화룡점정은 양재천. 강남구청이 사업주체지만 내막적으로는 삼성이 양재천 복구에 30억원을 투자해 ‘환경’이라는 21세기 최고의 주거조건을 안겨 주었다.
▼그때 삼성그룹 회장실에선 어떤 일이 있었나
98년 3월 서울 삼성그룹 본사 이건희 회장실. 삼성그룹 핵심임원들은 굳은 표정으로 이 회장앞에 섰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습니다.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삼성 임원)
“대안이 뭔가?”(이 회장)
“반값으로 팔든지 아니면 아파트를 짓는 방법이 있습니다”(삼성 임원)
이날 회의는 삼성이 94년 본사 사옥을 짓기 위해 사들인 서울 강남구 도곡2동 2만3000평의 처리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삼성이 102층의 사옥을 지으려던 계획이 주민들의 반발로 무산된데다 외환위기까지 겹쳐 평당 3000만원짜리 땅을 무작정 들고 있을 순 없었던 것. 결국 이회장은 아파트 건설을 택했다. 단 조건이 붙었다.
“세계 최고 수준으로 삼성 사옥을 짓기로 했던 자리다. 최고의 사람들이 모이는 최고의 아파트를 지어라.”
당초 40층으로 지으려던 경영진의 계획은 “높이도 최고여야 한다”는 이회장의 지시로 여의도 63빌딩보다 10m 높은 66층 아파트를 짓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날의 결론이 오늘의 타워팰리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타워팰리스는 국내 최초의 한 건물로 이뤄진 계획도시가 됐다.
▼두 샐러리맨의 대치동 입성기
증권사 과장인 장모씨(35·서울 성동구 행당동)는 요즘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갈 딸을 보면 갑갑해진다. 우연히 지역 신문에서 본 ‘성동구에서 과학고에 입학한 학생 2명’이라는 기사 내용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잠들기 전 부인에게 넌지시 말을 건네봤다.
“애들 교육 때문에 다들 대치동으로 간다는데 우리도 옮길까?”
“샐러리맨이 대치동 입성하기가 쉬운 줄 알아요? 여기 42평 아파트를 팔아도 32평 전세값도 안되는데. 또 생활비는 어떡하구요.”
요즘 장씨 같은 고민에 빠진 30,40대 가장이 한둘이 아니다. 이중에는 터무니없는 집값에 불평을 늘어 놓으면서도 무리를 해서 대치동에 입성하는 샐러리맨이 적지 않다.
일산 신도시 33평형 아파트에 살았던 강모씨(45)는 지난해 11월 대치동 청실아파트 31평형을 사서 옮겨왔다. 그대로 있다가는 중학교 3학년인 아들이 서울 소재 대학에 가기 어렵다는 주위의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돈. 일산의 아파트 매매가격이 1억8000만원인데 대치동 청실아파트는 3억7000만원이었다. 급한대로 부족한 1억9000만원중 1억원은 은행에서 빌렸다. 나머지 가운데 5000만원은 청약통장과 저축성보험, 장기적금 등 모든 통장을 해약해 일단 마련했다. 그래도 모자란 4000만원은 처가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12월 대치동에 입성한 보험회사 직원 김모씨(38)는 이보다 더 어렵게 옮긴 경우. 일산 신도시의 32평 아파트를 1억8000만원에 처분했지만 이 돈으로는 3억3000만원이나 되는 도곡동 삼성사이버아파트 34평의 전세값도 댈 수 없었다. 결국 2억원을 보증금으로 걸고 매달 130만원 월세 형식으로 입주했다. 좀 더 싼 전세를 구하려 했지만 매물이 없었다는 것.
“굳이 집값이 엄청나게 오른 때 옮겨야 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씨는 “들어오려는 사람이 줄을 섰는데 하루라도 빨리 들어오는 게 싸게 먹히는 것”이라고 답했다.
실제로 그렇다. 지난해 수능이 어렵게 출제되고 경기 지역의 고교평준화제도가 실시되면서 특히 분당 일산지역으로부터 대치동으로의 전입수요는 예년에 비해 3배 이상 증가했다. 덕분에 아파트 매매가, 전세가는 상상을 초월해 치솟고 있다. 전세가격은 사상 최초로 평당 1000만원을 넘어선 지 오래다. 삼성 대치 개포 우성2차 45평형의 매매가격이 8억원에 육박하고 도곡 삼성 래미안아파트와 사이버아파트 34평형대는 4억5000만원∼5억원에 이른다.
샐러리맨들이 무리해서라도 대치동에 입성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자녀 교육. 증권사 과장인 장모씨(35·서울 성동구 행당동)는 요즘 초등학교 4학년인 딸만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지역 신문에서 본 ‘성동구에서 과학고 입학생 2명’이라는 기사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치동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다.
박현진 기자 witnes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