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인터뷰/김수환추기경]"권력이란 무서운 것…욕망 비워야"

  • 입력 2002년 1월 14일 18시 17분


나라가 극도로 어지럽고 모두들 자기 목청만 높일 때 그리워지는 ‘시대의 어른’이 있다. 김수환(金壽煥·80) 추기경이다.

새해 벽두에 각종 비리가 터져 나오고 검찰총수가 한밤에 사퇴하는 등 나라가 뒤숭숭한 가운데 14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 집무실로 김 추기경을 찾았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해 연두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는 시간이었다.

6평 남짓한 집무실은 아담하고 소박했다. 책상에 놓여있는 난초가 막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고령임에도 추기경의 얼굴 표정은 건강해 보였다. 그러나 청력이 약화된 때문인지 인터뷰가 시작되자 왼쪽 귀에 보청기를 끼었다.

-올 한해 추기경님의 소망과 기원에 대해 먼저 여쭤보고 싶습니다.

“국민 여러분이 복 많이 나눠 가지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인간을 존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에게 닥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올 한해는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 월드컵 등이 잇따라 열립니다. 국가적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서울올림픽 때도 그랬던 것처럼 우리 국민은 국가적 대사가 열리면 친절과 봉사, 희생정신으로 일을 잘 치러냅니다. 이번 월드컵도 그럴 것이라고 봅니다. 올해에는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 그리고 몇 군데 보궐선거와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정당별 선거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선거로 한 해를 보내게 될텐데 아무쪼록 출마하는 분이나 정당인들 모두가 권력에 대한 욕망을 비우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진심으로 봉사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지난해는 9·11 테러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보복 공습 및 잇단 게이트 파문으로 나라 안팎이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의 자성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9·11 테러는 온 세계인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테러범을 응징해야 한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응징의 방법이 군사행동이나 전쟁이라는 것은 심각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는 악순환을 가져오고, 문명간 종교간 갈등과 대립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테러는 용서될 수 없지만 왜 그런 테러가 나왔는지, 미국의 잘못은 없었는지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미국 등 강대국 지도자들은 전쟁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인류 평화를 이룩해 나가기 바랍니다.”

-추기경님께서는 김대중 대통령을 위해 특별히 많은 기도를 해주셨고 대통령 취임 초기에는 “전임 대통령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충고하신 적이 있습니다. 김 대통령에게 해주실 말씀은….

“김 대통령께서 그동안 수고도 많이 했고 성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판도 많아 괴로운 시간도 있었으리라 봅니다. 아무쪼록 마지막 한해는 사심(私心)을 버리고 오로지 나라와 국민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해 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공명정대한 선거를 치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주실 것을 당부합니다. 꼭 유종의 미를 거두셔서 임기 후에는 5년 동안의 잘못된 것도 덮어둘 만큼 훌륭한 대통령이었다는 평판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천주교 평신도’ 김대중과 ‘대통령’ 김대중에 대해서 혹 차이를 느끼셨습니까.

“그분은 줄곧 야당 지도자였기 때문에 단순한 평신도로 대해본 적은 없습니다. 초창기에 저는 그분의 말씀을 듣는 편이었어요. 공부도 많이 하고 말씀도 잘 하시고, 우리나라 현안과 미래에 대해 논리정연한 사고를 갖고 계신, 보기 드문 정치인입니다. 지금도 많이 아시고 말씀을 잘 하세요. 평신도 김대중과 대통령 김대중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쨌거나 김 대통령이 이제는 자신에 대한 비판에 초연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대권 후보들이 올해 추기경님을 찾아뵙고 서로 지지를 부탁할 것으로 보입니다. 추기경님이 생각하시는 이번 대통령 선거의 의미는 어떤 것인가요. (추기경은 “제 방에는 오지 않을텐데요”라며 빙그레 미소를 지은 뒤 말을 이어 나갔다)

“올 대선이 어느 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우리 정치 풍토를 혁신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국민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정치’라고 했습니다.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국민과 함께 희로애락을 나누면서 국민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나눠줘야 합니다.”

-평소 생각해오신 바람직한 대통령의 조건은….

“말(言)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 룰을 존중하는 사람,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애정을 가진 대통령입니다.”

-이번 대통령선거를 통해 ‘3김(金) 청산’과 ‘세대교체’가 이뤄질 것으로 보십니까.

“세대교체는 외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젊은 사람들이 치고 올라갈 테니까요.”

-추기경님도 따지고 보면 대구 출신으로 원조 TK이신데….

“고향으로 보면 저도 TK가 되겠지만 저 스스로는 한번도 TK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구 사람은 대구, 광주 사람은 광주를 싸고 돌면 지역감정의 늪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지 않습니까? 수십년전 만해도 영남 출신의 엄민영(1915∼1969)씨가 호남에서 당선되고, 호남 분인 조재천(1912∼1970)씨가 대구에서 당선되곤 했습니다. 지역 감정에 대해서는 누구나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실천은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나부터 그런 생각을 고쳐야 합니다.”

-동아일보는 올 한해 우리 사회의 어젠다를 ‘페어플레이’로 정했습니다. 페어플레이에 대한 평소 생각은이 있으시면….

“페어플레이의 기본은 룰과 상대 선수에 대한 존중입니다. 지도층이 기초 질서를 잘 지키고 상대방을 존중해야 국민이 박수를 보내고 승리 후에도 패자의 승복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이번 지방선거와 대선에서 각 당의 후보자와 정당인들이 특히 이 점을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해 한국 언론은 혹독한 시련과 갈등을 겪었습니다. 한국 언론에 대한 추기경님의 고언을 듣고 싶습니다.

“앞서 말한 페어플레이 정신이 정착되려면 언론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글로 그치지 말고 언론인의 정신과 사상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올 한해 국민 모두가 가슴에 새겨둘 만한 짧은 메시지 하나만 들려주십시오.

“한마디로 ‘바르게 살자’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진리는 반드시 밝혀질 날이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룩될 날이 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는 말입니다. 인도의 간디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인도의 독립과 진리를 같이 놓고 이를 맞바꾸라면 독립을 포기하더라도 진리를 택하겠다’고 했어요. 그만큼 진리를 소중하게 여긴 것이죠. 미래를 위해 더 소중한 것은 과학 정보기술이 아니라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 민족을 떠나 인류 전체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혹시 인간적인 고뇌를 갖고 계시다면….

“제가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으로는 많이 말했지만, 그 분처럼 남을 사랑하고 봉사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살다가 하느님 앞에 가면 제가 고할 수 있는 것은 용서와 자비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만간 제게도 죽음이 오지 않겠습니까. 하느님께 저 자신을 모두 맡길 수 있도록 마음을 비우고 죽음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추기경님의 건강을 염려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요즘 근황이나 취미생활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건강을 염려해주시는 사람이 많다니 감사합니다. 건강은 그럭저럭 좋은 편입니다. 특별히 하는 운동은 없고 집무실 근처를 매일 30분 정도 산책하는 것으로 운동을 대신합니다. 방 안에서도 왔다갔다하면서 걷습니다. 식사는 양은 많지 않지만 고르게 세 끼 다 먹고 간식은 적게 하는 편이에요. 담배는 교황님이 한국을 방문하던 84년 ‘한순간’에 끊었고 술은 본래 잘 못해요.”

-즐겨 보시는 TV 드라마나 최근에 읽으신 책은….

“‘태조 왕건’과 ‘여인천하’를 즐겨봅니다. 어젯밤에도 ‘태조 왕건’에서 견훤이 자신의 후계자리를 놓고 아들과 다툼을 하는 것을 보고 ‘권력이란 부자간도 갈라놓을 수 있을 만큼 무서운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에 최한철 고종순 부부가 쓴 책 ‘사랑과 아픔은 돌아누울 수 없는 것’과 ‘하늘나라 여보에게 띄우는 사연’ 등 두 권을 정말 감동깊게 읽었습니다. 정상인인데도 일부러 장애인 남성과 결혼해 돌보면서 25년을 함께 살아온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1998년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나시면서 운전면허를 따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

“면허를 따보려고 여섯 번인가 연습을 했지요. 제 기사가 소질이 있다고 해요. 그러나 시간이 부족해 요새는 단념했어요. 설령 면허를 딴다고 해고 서울 시내 운전은 못할 것 같아요.”

-테니스와 축구 중계를 즐겨 보시는 것으로 압니다만….

“윔블던테니스 대회 같은 것은 밤을 새워 보지요. 축구 한일전도 빠짐없이 봅니다. 월드컵 개막식도 꼭 참석하고 싶습니다.”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추기경님의 숙소를 구경하고 싶다”는 취재진의 부탁에 추기경은 이례적으로 숙소로 안내했다. 언론에는 최초로 공개되는 추기경의 숙소였다. 숙소는 책상과 소파, 서재 외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었고 침실에는 평범한 침대가 놓여 있었다. 문 앞에 추기경 신발이 있었다. 신발 속의 깔창이 오래돼 깊숙이 파여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무실을 나서는 기자들에게 추기경은 자신의 얼굴 사진이 담긴 열쇠고리를 선물로 주었다. 그리곤 “올해 내가 출마합니다. 기호 1번입니다”라고 말을 건넸다. 기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추기경은 “그렇습니다. 천국(天國)에 출마하려는 겁니다”라며 미소를 지었다.

정리〓이광표기자 kplee@donga.com

윤정훈기자 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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