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에는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부자, 지식인, 권력자들도 섞여있었다. 이는 선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만 해도 부 자체가 악이요, 가난한 것이 미덕인 것처럼 간주되는 분위기였으나 성경은 결코 부를 정죄하고 있지 않다.
디모데전서 6장 17∼21절에는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富)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라고 쓰여 있다. 이 성경 본문은 한마디로 부자에게 주는 ‘복음’ 이며, 부자가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부자만이 가지는 시험(Temptation)이 있음을 경계한다. 부자가 빠지기 쉬운 시험은 ‘돈이 있으면 인격 도덕 지식도 갖춘 것’ 이라고 착각하기 쉽다는 것과 ‘돈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고 생각하는 점이다. 하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돈으로는 건강과 진정한 사랑을 살 수 없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또다른 시험은 돈 있는 사람이 스스로를 귀족화하는 것과 ‘부는 축복이요 가난은 저주’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런 생각들은 엄청난 착각이다.
성경은 ‘돈은 많아도 마음은 가난해야 하고, 그래야 진리를 배우게 된다’ 고 가르친다. 우리는 결코 돈에다 소망을 두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 손에 달려있지 돈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디모데전서의 말씀처럼 우리에게 후하게 주시고 누리게 (Enjoy)하신다. 후하게 받았더라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면 진정한 복이 아니다. 소유물에 묶여 자유로워 질 수 있다면 이는 결코 축복이 아니다. 물질의 축복을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선한 일을 해야 한다. 돈은 곧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기회이자 명령이며 사명이기 때문이다.
유태인이 만든 ‘자선의 황금계단’ 이라는 도표는 자선의 단계를 △주고 나서 후회하는 단계 △주기는 하지만 고통 당하는 이의 형편을 감안하지 않고 주는 단계 △주기는 하지만 요청하지 않을 때는 주지 않는 단계 △주기는 주되, 받는 사람 기분나쁘게 하며 주는 단계 △받은 사람은 준 사람을 알지만, 준 사람은 받은 사람을 모르는 단계 △준 사람은 받은 사람을 알지만, 받은 이는 누가 주었는지 모르는 단계 △준 사람도 받은 사람도 둘 다 모르는 단계 △미리 자비를 베풀어 빈곤을 면하계 하는 단계로 나누고 있다.
탈무드에는 ‘선물을 주면서 말을 많이 하면 안주는 것만 못하다’ 는 말이 있다. 자녀들에게 돈을 주면서 ‘어디에 쓸 거냐 돈 아껴 써야 한다’ 고 훈계하느니 차라리 ‘많이 못 줘서 미안하다’ 고 말하는 것이 낫다.
물질이 많다고 부자는 아니며, 선한 일 한 만큼만 부자다. 또 자기를 위한 부자와 하늘나라를 위한 부자는 다르다. 하나님 앞에서는 선한 일 하는 자가 부자인 것이다.
물질은 내게 있을 때 내 것이 아니라 남에게 준 다음에야 내 것이 되고, 남에게 준 것과 선한 일에 쓴 것만 하나님 장부에 기록된다. 하나님 장부에 내 삶과 물질이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를 늘 생각하라. 선한 일에 부(富)하고, 하늘 나라의 참된 생명을 염두에 두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