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일기]고향의 겨울풍경

  • 입력 2002년 1월 17일 15시 40분


어린 세 딸을 데리고 고향 황해도 옹진을 떠나 피난길에 오른 부모님은 강원도 철원에 새 터전을 마련했다. 춥디 추운 곳. 철원을 고향으로 알고 자란 나에게는 겨울철 추운 날씨가 어린 시절 향수를 자극하는 소재가 된다.

어린 시절 내 고향의 겨울 풍경은 ‘펑펑’ 소리를 내는 듯 쏟아져 내리는 눈 속에서 펼쳐졌다. 눈 내리는 날이면 동네 아이들이 모두 한 무리가 되어 눈 위에 벌러덩 누워 눈사진을 찍는가 하면 눈사람 만들기, 눈싸움하기에 뻘뻘 땀을 흘리기도 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한 가족 같았다. 내 자식 네 자식 할 것 없이 어른은 다 내 부모요, 아이들은 다 내 자식이었으니까.

저녁 무렵 여느 때처럼 친구집에 놀러가 수다를 떨고 있으면 친구 어머니는 눈 구덩이를 파헤치고 땅에 묻어둔 무를 꺼내셨다.

잠자기 전 고구마나 감자는 소화가 안 될 지 모른다며 무를 쭉쭉 잘라 접시 가득 담아주셨다. 그러면 우리는 토끼 새끼가 된 양 아삭아삭 앞니로 야무지게 갉아먹고 나서 “꺼억∼” 잘 먹었다는 신호음(?)을 냈다.

실컷 놀고 늦은 밤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 아버지는 호롱불을 밝힌 채 엿을 만들고 계셨다. “이제 오냐, 출출할테니 이것 좀 먹어라.” 푸근한 말과 함께 한 대접 담아 내어주시던 그 달콤한 엿밥. 먹어본 것 많고 먹을 것도 많은 요즘 아이들은 모르는 그 묘한 맛이 어찌 이렇게 기억에 생생할까.

이제 세월은 흘러흘러 서른을 바라보는 장성한 세 딸을 둔 주부가 됐다. 하지만 지금도 그 작고 초라했던 초가집과 넉넉한 동네 인심이 그립기만 하다.

유영자(58·주부·서울 송파구 송파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