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눈에 띄는 것은 생산부문에서의 비전문성 확대다. 아직도 문단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고, 문학 생산자로서의 전문성을 검증하는 각종 등단제도가 유지되고는 있어도 그 권위는 무너진 지 오래다.
오히려 근년 들어 더 자주 경험하게 되는 것은 비전문성의 약진이다. 좀 과장하면 누구든 소설이라고 쓰면 그게 곧 소설이며, 시라고 쓰면 곧 그게 시가 되는 세상이 되어간다는 느낌이다.
▼非전문가들의 잡문 판쳐▼
물론 이러한 현상을 굳이 부정적으로 보거나 비판해야 할 이유는 없다. 관점을 달리하면, 그런 생산자들의 증가는 전문성의 저변 확대가 될 수도 있고, 문화적 층위를 다양화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 또 기존의 검증제도가 지닌 여러 약점들을 보완하는 기능도 한다. 애초에 전문성을 검증하는 제도 자체가 무리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유통과 소비에 관련된 검증제도인 비평에 이르면 문제는 달라진다. 생산된 문학작품의 품질을 평가하는 비평은 문학이라는 제도가 이어져 온 세월이나 퍼져 있는 공간만큼의 유서 깊고 다양한 원리들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요구하며, 그것들을 적용하여 객관적인 기준을 설정할 수 있는 감각과 자질이 바탕되어야 한다.
또 비평은 독자의 주관적인 해석권과는 달리, 비평가 자신을 넘어 다수의 소비와 유통에 영향을 주는 것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도 전문성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들어 더 치명적인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비평이 아닌가 한다. 대중 매체들이 자신의 성향이나 이익을 위해 전문성을 검증받지 못한 잡문들을 마구잡이로 실어 비평을 대신하는가 하면, 사적이고 주관적인 독자의 해석권을 대중운동의 형식으로 확산시켜 비평이 소비와 유통에 관여하는 중요한 기능을 대신하기도 한다.
특히 어떤 이는 자신의 분야에서는 변변한 저술 한 권 없으면서, 그와 같은 잡문으로만 그 어떤 비평가보다 더 비평가적인 명성과 추종자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은 대다수 비평가들이 그 같은 현상을 방관해 온 일이다. 어느 사회나 있기 마련인 문화적 파파라치나 스토커쯤으로 여겼는지 모르지만, 결과는 적잖이 심각하다. 이 몇 년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나 취향에 맞지 않은 몇몇 작가만을 집요하게 공격하여 독자와 이간시키는 것으로 재미를 보던 어떤 비전문 비평가가 드디어 ‘문학판’ 전체를 ‘손보겠다’고 나선 일이 그렇다.
다행히도 몇몇 최신호 계간지에서는 전문성을 검증받은 비평가들의 정색을 한 응전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비전문적인 말과 논리에 대응하느라 그랬는지 용어의 속화(俗化)와 감정적인 논리는 전문성의 위기마저 느끼게 했다. 비전문성의 폐해가 독자들을 오도한 정도를 넘어 비평행위 그 자체에까지 미친 사례가 될 듯싶다.
어떤 이는 문화의 전문성에 관한 시비는 패트런(문화후원자)의 선택에 달린 문제라고 한다. 곧 문화생산자나 유통관리자가 논의할 성질이 아니라 현대의 패트런인 소비대중(독자)의 선택이 결정한다는 뜻일 것이다. 맞는 말이다. 모든 것이 상품화하고 시장구조 속에 편성되어 가는 시대에 문화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독자가 더 이상 고품질 전문성을 요구하지 않게 되는 것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문학 상황이다.
▼문화 전문성 해체돼서야▼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문화의 전문성 해체가 그런 시대의 흐름과 무관하거나 또는 그 흐름을 올라탄 고의적인 의식의 왜곡과 오도에 불과하다면 걱정은 남는다. 가령 정치적인 평등권을 문화에도 적용시켜 전문성의 해체를 문화적 평등권의 성취로 대중을 착각하게 만드는 일이 그렇다. 그 어느 때보다 평등권에 예민해져 있는 우리 대중의 구미에 아첨하는 전략으로는 훌륭하지만, 세계사의 어떤 불행한 시점처럼 정치과잉인 시대의 문화적 불모 또한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 문 열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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