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러시아 음악을 찾아서]문화의 수도 상트 페테부르크

  • 입력 2002년 1월 22일 18시 44분


“상트 페테르부르크, 이 도시는 지구상의 모든 도시 중에서도 가장 환상적인 역사를 가진 곳이다.” (도스토예프스키)

러시아의 수도는 누구나 알다시피 모스크바다. 그러나 러시아의 ‘음악문화 수도’가 상트 페테르부르크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애향심에 넘치는 일부의 모스크바인들 외에는 드물 것이다. 글린카를 필두로 차이코프스키, 쇼스타코비치 등 러시아 작곡가 대부분이 이곳 출신이거나 이곳에서 활동했다. 이삭성당, 성 니콜라이성당 등 러시아 음악의 근원지인 정교회 음악 전통을 간직한 교회도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구 소련 시절 레닌그라드로 불린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발틱해와 인접한 핀란드만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유럽에 가까운 문화전통과 건축양식으로 유명하다. 로마노프 왕조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가 1703년부터 스웨덴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요새를 세우고 아름다운 시가지를 만들어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옮겨왔다. 푸쉬킨이 ‘유럽을 향해 열린 창’이라고 예찬했던 페테르부르크는 200년 이상 러시아의 정치,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궁전과 성당, 유물과 유적지가 옛 모습 그대로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러시아 예술의 본거지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에는 옛부터 겨울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발레와 콘서트가 열렸죠. 그런데 소비에트 시대부터 완전히 뒤바뀌어 외지인들은 여름에 주로 이 곳을 찾게 되었습니다. 겨울 예술광장축제의 목적은 단지 음악 페스티벌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화 도시의 겨울에 생명과 영혼을 찾아주는 것이 목적입니다.”

예술광장축제의 음악감독 유리 테미르카노프는 확신있는 태도로 힘주어 축제의 목적을 밝혔다. 특히 이번 축제부터 부활된 ‘발레의 밤’에는 러시아 최고의 발레리나 볼로흐코바가 출연해서 관객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5일 폐막 연주회에서는 스베틀라노프와 함께 러시아의 살아있는 마지막 거장 로제스트벤스키가 지휘봉을 잡아 부인인 피아니스트 포스트니코바와 함께 베토벤의 ‘합창환상곡’을 열연했다.

“주로 기업의 후원과 티켓 수입으로 예산을 충당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한국 기업의 스폰서는 없었어요. 러시아에서 일하는 한국 기업이 많지만 이곳에 잘 알려진 기업들도 클래식 보다는 대중음악에 더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요.”

필하모니아 볼쇼이홀의 유리 슈바르츠코프 총감독의 말에서는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우리 기업의 문화에 대한 인식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반면 후원사의 이점을 살려 축제 기간 내내 볼쇼이홀 앞에 진열된 미 포드 자동차의 화려함은 프로그램에 적혀있는 일본 기업들의 명단과 함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지난해 12월31일 게르기예프 지휘의 송년 갈라콘서트는 러시아 전역에 중계되었다. 마린스키 극장의 음악감독인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대통령과 직통전화가 가능할 만큼 이곳 음악계의 절대적인 존재다. 이날 콘서트에서는 외국인에게 배타적이기로 소문난 마린스키 극장에서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프리마 발레리나 유지연이 출연해 많은 청중의 박수를 받았다.

서유럽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발레와 콘서트만이 이 도시를 밝혀주는 것은 아니다. 서기 988년 키예프 공국의 블라지미르 대공이 비잔틴으로부터 받아들인 기독교는 이후 천년 역사에서 러시아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왔다. 정교회 음악은 그래서 러시아 음악의 근원지이기도 하다.

6일 러시아의 성탄 전야에 리투르기야(정교회미사)가 집전되는 성 니콜라이성당. 촛불을 밝혀든 신자들은 이콘(성상화) 앞에서 봉헌하고 향을 지폈다. 낮은 베이스의 선창이 시작되면 2층의 성가대석이 ‘고스포디 포밀루이’(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로 되받고 참석자들은 세 손가락으로 성호를 긋는다.

정교회 구력(舊曆)에 따른 성탄절인 7일 저녁 카펠라홀에서는 체르누센코가 지휘하는 전통의 카펠라합창단이 라흐마니노프의 교회음악 ‘리투르기(liturgy)’를 연주했다. 제 10곡, ‘주를 찬송하나이다’에서 허밍으로 받쳐주는 합창에 실려 두 손 모으고 기도하는 소프라노 독창은 험난한 세상을 지나 천상(天上)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메시지였다. 러시아 음악의 뿌리가 교회음악임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방송작가

poetandlove@hanmail.net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