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83년 ‘비구니’ 제작 때였다. 이후 이들의 인연은 ‘장군의 아들1’(90년)-‘장군의 아들2’(91년)-‘장군의 아들3’(92년)-‘서편제’(93년)-‘태백산맥’(94년)-‘춘향뎐’(2000년)-‘취화선’(2002년)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허물 없으면서도 속정 깊은 한국 정서’로 맺어져 있다. 그간 수많은 감독 배우 작가들을 배출하며 영화계의 큰 인맥을 만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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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인연은 셋이서 공유한다
이들은 서로 새로운 사람들을 소개하고, 이를 바탕으로 걸작들을 만들어왔다. 92년 이사장이 작곡가이자 가수 김수철씨를 임감독에게 소개했다. 이사장은 친분이 있는 김씨가 국악의 현대화에 몰두하고 있는 것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마침 임감독은 ‘서편제’의 음악을 맡을 작곡가가 필요했다. 이사장은 임감독과의 자리에 김씨를 느닷없이 불러들이는가 하면, 김씨의 음악을 담은 테이프를 임감독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이후 김씨는 ‘태백산맥’‘노는 계집 창’까지 음악을 맡았다.
임감독은 이사장에게 철학자 김용옥씨를 소개했다. 임감독은 80년대 중반 고려대 교수직을 그만두고 쓸쓸하게 지내던 김씨를 만나 갖가지 철학의 주제들에 대해 허물 없이 묻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임감독은 시나리오 창작자로서 김씨의 면모를 알게 됐고 이사장에게 소개했다. 김씨는 ‘장군의 아들1’‘취화선’의 시나리오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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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동락을 통해 인연을 깊게 한다
처음에 세 사람의 인연은 ‘악연’처럼 비쳤다. 83년 ‘비구니’, 84년 ‘노을’, 87년 김용옥씨가 시나리오를 쓴 ‘도바리’에 이르기까지 함께 손대는 작품마다 당국의 압력으로 제작을 접었다. 수억원을 날렸다. 하지만 이는 결코 서로를 원망하지 않는 사이임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혹독한 도제식 수업으로 주목받았던 정일성 촬영감독의 제자 이후곤씨는 한때 자신이 연애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정 감독으로부터 ‘내침’을 당했다. “연애하는 아이 치고 실수 안하는 사람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정 감독은 ‘달아난’ 이씨를 반년후 다시 붙잡았으며 결국 99년 이씨의 주례까지 섰다. 이씨가 촬영감독으로 정식데뷔한 ‘세기말’‘번지점프를 하다’의 현장까지 가서 제자의 홀로서기를 지켜봤다. 제자들은 “정 감독님은 첫 작품을 만드는 후배가 서울 인근에서 촬영하면 반드시 한두번 들러 지켜본다”고 말했다.
2000년 ‘춘향뎐’이 칸영화제 본선에 오르자 이사장은 “이 자리에 안성기가 같이 왔어야 하는데…” 하고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안씨는 임감독 소개로 이사장과 인연을 맺은 후 ‘한국 영화가 어렵던 시절’ 톱스타로서 개런티 인상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사장과 임감독은 “우리의 캐스팅에는 절대 정실(情實)이 없다”며 “그러나 적임자가 여럿 있다면 서슴없이 안씨를 택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보다 안씨의 연기력 때문이지만 동고동락에서 보여준 인간미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 안씨는 ‘취화선’에서 장승업의 은인인 김병문역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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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은 인연을 낳는다
임권택, 정일성 두 감독 밑에서 일했던 연출부-촬영부 제자들은 데뷔한 다음 서로 감독-촬영감독으로 다시 만나는 예가 적지 않다. 김의석-최정우, 송능한-이후곤씨가 이같은 경우다. 김의석 감독은 “5월 크랭크인에 들어갈 조선시대 칼잡이들의 이야기 ‘청풍명월’의 촬영현장으로 임, 정감독이 가꾼 ‘취화선’ 세트장을 물려받을 예정”이라며 “얼마전 ‘취화선’ 현장으로 찾아갔더니 두 감독님이 세트를 놓고 충고를 아끼지 않아 감회가 새로왔다”고 말했다.
김홍준감독 역시 ‘서편제’ 제작 때 인연을 맺었던 임, 정 두 감독의 스태프와 의기투합해 데뷔작 ‘장미빛 인생’을 만들었다.
이사장을 20여년간 보좌하다 최근 기획홍보사 PL엔터테인먼트를 차린 송혜선씨는 “세 분의 인연을 그대로 물려받아 든든하다”며“이태원 사장님이 계속 홍보, 연기자 매니지먼트 등의 일을 맡겨주어 제작자로 홀로 설 때까지 큰 힘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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