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석학으로 꼽히는 부르디외는 사회구조와 사회이론을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비판사회학의 거두이면서 평생을 모든 권력에 저항한 행동하는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젊어서는 불평등을 확대 재생산하는 권력에 맞섰고 90년대 들어서는 세계화라는 이름의 또 다른 권력과 싸웠다.
그의 투쟁은 연구실에서만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실제 노동자 파업과 환경운동 등 다방면의 사회운동 현장에 직접 뛰어 들었다.
부르디외는 항상 사회적 약자 편에 섰다. 학교를 통한 엘리트 재생산 과정의 분석에 많은 연구를 할애, 약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무능한 게 아니라 사회구조가 부당하게 그의 상승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해왔다. 60년대 프랑스 사회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고등교육 제도에 대한 그의 연구와 비판은 68혁명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81년부터 프랑스 지성의 전당 ‘콜레주 드 프랑스’ 의 교수를 지낸 그는 90년대 들어서 노엄 촘스키와 함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반대 진영의 대표적인 학자로 나섰다. 그는 “조종하는 기관이 없이 익명의 집단적 존재에 의해 이루어지는 세계화는 조종사 없는 비행기처럼 위험하다” 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는 권력에 맞서는 반(反)권력으로서의 지식인의 역할을 일관되게 강조했다. 92년 르몽드지와의 인터뷰에서는 “내가 끝까지 지키려는 것은 비판적 지식인의 필요성과 가능성이다. 진정한 비판적 반권력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없다” 고 역설했다.
좌파 신문인 르몽드지도 ‘좌파중의 좌파’ 라고 평가한 부르디외는 2000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작가회의에서 “상업이윤이 지배하도록 만든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기 위해 작가와 예술가, 학자들이 총동원돼야 한다” 고 주장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지식인이 빠지기 쉬운 자기기만의 함정을 끊임없이 경계했다. 스스로 나는 내안에 있는 지식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고 말했을 정도.
그의 동료인 석학 자크 데리다는 “부르디외는 자신을 포함해 사회의 모든 분야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최근 들어서는 더욱 급진적이고 고독한 투쟁을 벌였다” 며 부르디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그의 타계 소식이 알려지자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리오넬 조스팽 총리는 각각 성명을 내고 “프랑스는 가장 재능있고 저명한 지식인을 잃었다” “그는 프랑스의 위대한 지성이었다” 고 애도했다. 르몽드지는 24일 1면 톱기사로 그의 죽음을 전하고 문화면 1개면을 털어 부르디외의 삶과 학문세계를 조명했다.
파리=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