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창립 60년을 맞은 일본 도쿄의 유서깊은 연회장 메구로가조엔(目黑雅敍園) 복원공사가 3년간의 막을 내렸다. 개관식을 맞아 전 매스컴의 눈길은 한 젊은 한국인에게 쏠렸다. 서른살을 갓 넘긴 칠장이(漆匠) 전용복. 3년전 일본 땅을 처음 밟은 그가 3만평 대지에 펼쳐진 이 대형 공간의 미술품 모두를 도맡아 복원해 낸 것.
그가 자전 에세이 ‘나는 조선의 칠쟁이다’를 썼다. 352쪽 분량의 책에는 나전에 눈뜨기 시작한 가구공장 근무시절, 자기만의 공방 설립, 밥상 하나를 수리한 인연으로 메구로가조엔의 미술품 복원 책임을 맡기까지의 과정이 낱낱이 담겨있다.
“실무자들이 몇 번이고 ‘과연 할 수 있겠느냐’며 되묻더군요. ‘불가능하다고 말한 사람들은 목숨을 걸지 않았다. 나는 목숨을 걸겠다’고 대답했지요.”
처음 맡은 작업량은 옻칠과 상감(象嵌) 등 전체 미술품의 10% 분량. 그러나 꼼꼼하다는 일본인들도 탄복시킨 작업솜씨 덕에 그는 점차 목판화와 일본화 등 전체 미술품 복원까지 맡게 됐다.
“옻칠작업에서 먼지는 가장 큰 적입니다. 그래서 신칸센으로 도쿄에서 세 시간 넘게 걸리는 이와데현(岩手縣) 산간 오지 폐교에 작업실을 마련했지요”
그곳에 그는 온가족을 데려갔다. 지역의회 의원들의 서울 방문을 성사시키고 초등학생들의 교환방문도 이루어내면서 지역의 ‘귀빈’으로 자리잡았다. 3년의 작업기간은 기술의 한계를 극복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한 예로, 미술관 엘리베이터에도 옻칠을 하기로 결정됐죠. 화학 칠을 먼저 하자는 엘리베이터사 관계자들을 실제 도장 실험으로 압도했고, 열처리 과정에서 철판이 굽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끝없이 실험하기도 했어요. 실험도구마저도 스스로 제작해야 했죠.”
3년간 갖은 공을 들인 뒤의 메구로가조엔 재개관식장에는 일장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걸려있었다. 기술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불렀고, 전날까지 밤을 새운 그는 그만 식장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했다.
복원품만 찬사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메구로가조엔의 중심인 대회의장을 그는 자신의 창작품인 ‘일생의 역작’ 사계산수화로 가득히 채웠다.
“일본 칠공예는 정교함과 화려함으로 첫눈에 사람을 압도합니다. 반면 우리 칠공예에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은은한 깊이가 있습니다. 이 두 세계를 참고, 옛 전통을 계승하면서 우리 시대의 전통을 창조한 진정한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최근 그는 자신이 설립한 도쿄의 메구로가조엔 칠예연구소와 부산의 전용복 칠예연구소를 오가며 창작과 후진 양성에 몰두하고 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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