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논리의 라이벌' 부르디외-노직 같은날 영원으로…

  • 입력 2002년 1월 27일 18시 13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비판에 앞장서 온 프랑스의 세계적인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71)가 프랑스 현지 시각으로 23일 사망한 직후 ‘르몽드’지를 비롯한 프랑스 언론은 온통 그의 추모기사로 가득했다. 같은 시각 ‘뉴욕타임스’지에는 ‘하버드의 정치철학자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 63세로 죽다’란 제목이 달린 장문의 추모기사가 게재됐다. 하버드대 석좌교수인 노직은 부르디외와 정반대로 세계화를 강력히 뒷받침하는 철학을 제시해 온 미국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철학자였다. ‘뉴욕타임스’지는 다음날 부르디외의 추모기사를 노직의 기사보다 작게 다뤘다. 세계적인 명성에 비춰보면 공정한 평가라고 보기는 어려운 처사였다. 이 두 사람은 같은 날 암으로 먼 길을 함께 떠났지만, 유럽과 미국의 사상가로 두 사람이 걸어 온 길은 대단히 대조적이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비판에 앞장서 온 프랑스의 세계적인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71)가 프랑스 현지 시간으로 23일 사망한 직후 르몽드지를 비롯한 프랑스 언론은 온통 그의 추모기사로 가득했다. 같은 시간 뉴욕타임스지에는 ‘하버드의 정치철학자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 63세로 죽다’란 제목이 달린 장문의 추모기사가 게재됐다. 하버드대 석좌교수인 노직은 부르디외와 정반대로 세계화를 강력히 뒷받침하는 철학을 제시해 온 미국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철학자였다. ‘뉴욕타임스’지는 다음날 부르디외의 추모기사를 노직의 기사보다 작게 다뤘다. 세계적인 명성에 비춰보면 공정한 평가라고 보기는 어려운 처사였다. 이 두 사람은 같은 날 암으로 먼 길을 함께 떠났지만, 유럽과 미국의 사상가로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은 대단히 대조적이었다.

“각 사람들이 겪는 모든 불행을 사회 전체가 겪는 커다란 불행과 분리해 생각하는 태도는, 특정의 사회 부류에서 겪는 고통의 일부를 제대로 목격하고 이해하는 것을 스스로 금하는 태도다.” (부르디외의 ‘세계의 비참’ 중에서)

부르디외는 1930년 프랑스 남동부 지방의 소도시인 베아른에서 우체국 말단직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시골출신의 수재는 프랑스의 최고 엘리트 코스인 파리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갔지만 파리의 귀족적 분위기에서 ‘촌놈’으로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박사학위논문을 쓰지 않는 방식으로 권위주의적 교육제도에 저항했고, 그가 겪은 문화적 갈등은 뒷날 지역문화와 알제리 원주민의 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관심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가 1981년 미셀 푸코의 추천을 받아 프랑스 최고의 학자들이 모이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임명된 것도 파리의 지적 풍토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에밀 뒤르켐의 사회학을 계승했지만 10여년 전부터 과학적 중립성을 포기하고 투쟁가로 나섰다. 그는 과학적 투쟁성을 강조하며 사회학에 기반한 자신의 학문을 사회변혁의 무기로 삼았다. 이 때문인지 부르디외를 추모하는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의 사설 제목도 ‘과학적 투쟁자-피에르 부르디외’였다. 최근에는 반신자유주의와 반세계화 운동을 주도하며 프랑스 내 극우파에 대항해 싸웠다.

아카데미즘을 던지고 실천적 이론가로 나선 말년의 그에 대해 비판도 있었지만, 부르디외에게는 자기 자신도 연구 대상이었다. 말년의 그는 자신을 사회학적으로 자기비판하기도 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학문을 자기변혁과 사회변혁의 무기로 사용했다.

그는 약 30권에 달하는 저서를 낼 만큼 열정적인 저술가였다. 그의 주요저작인 ‘재생산’, ‘파스칼적 명상’, ‘세계의 비참’(이상 동문선) ‘구별짓기(상, 하)’(새물결) 등 10여권이 이미 국내에서 번역 출간됐고 현재도 여러 권이 번역 중이다.

“최소 국가(minimal state)야말로 정당화될 수 있는 가장 큰 국가다. 그보다 더 큰 어떤 국가도 국민의 권리를 침해한다.” (노직의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 중에서)

노직은 1938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작은 사업을 하는 러시아 출신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브루클린에서의 학창시절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던 그는 플라톤의 ‘국가’를 읽으며 감동을 받아 철학에 접근하게 됐다고 스스로 밝힌 적이 있다. 이것은 그가 정치철학을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된 계기였다.

그는 컬럼비아대 재학시절 ‘산업민주주의 학생연맹’의 지부를 창설했을 정도로 활동적이고 논쟁적인 인물이었다. 프린스턴대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1963년 25세의 나이에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30세에 하버드대 철학과 정교수가 됐다. 그는 대학원 재학시절부터 논리적이고 날카로운 논변으로 기존의 철학적 관점들을 논파하며 주목을 받았다.

그에게 세계적인 자유주의 철학자로서의 명성을 안겨 준 것은 1974년에 발간된 그의 첫 저서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Anarchy, State, and Utopia)’였다. 이 책의 발간 후 거의 30년 동안 그는 미국의 사회복지 제도에 대한 비판자로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관련 논쟁의 중심이 돼 왔다.

그는 특히 하버드대 동료인 존 롤스 석좌교수의 ‘정의론’을 비판하면서, 롤스 교수가 주장하는 분배적 정의는 부자들에 대한 부당한 세금부과를 정당화함으로써 개인 혹은 기업의 권리를 침해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 두 학자의 논쟁은 자유와 평등 문제와 관련해 사회철학 및 정치철학계를 장식한 기념비적인 것이었다.

국내에는 그의 저서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문학과지성사)와 ‘자유주의의 정의론’(대광문화사)이 번역 소개돼 있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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