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이사에서 농군으로 '제2의 인생'사는 진영호씨

  • 입력 2002년 1월 29일 13시 43분


모두가 산업화 물결에 휩쓸려 도시로 몰려가던 1960년대.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한 소년은 엉뚱하게도 농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 기차를 타고 읍내에 내려서는, 다시 돌투성이 비포장길을 덜컹거리며 거의 하루가 걸려 도착한 곳은 아버지의 고향 전라북도 고창. 잡초만 무성한 황무지의 언덕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흙내를 맡으며 소년은 이 다음에 커서 꼭 농사를 짓겠다고 결심했다.

▽농장 너비만 2㎞〓고창읍내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공음면 선동리 ‘학원(鶴苑)농장’. 대기업 이사를 하다 10년 전 농군으로 변신한 진영호씨(54)가 삶의 터전을 가꾸는 곳이다.

함박눈이 부슬비로 바뀐 남녘의 들판엔 검붉은 흙 위로 파릇한 보리싹이 돋아 있었다. 농장 입구를 가리키는 돌비석을 지나니 ‘학원농장 1㎞’란 표지판이 나온다.

진씨의 농장은 좌우 길이가 2㎞에 이른다. 진씨는 “옆으로만 길다”며 손사래를 치지만 농장은 무려 17만평. 13만평의 보리밭은 국내에서 거의 최대 규모다. 꽃농사를 4000평이나 짓고 과수원도 4000평이 넘는다. 1만평은 관광농장으로 꾸며놓아 그야말로 ‘기업형’ 농부이다.

▽대기업 이사에서 농군으로〓중고등학교 내내 농군의 꿈을 꾸던 소년은 끝내 서울대 농대에 들어갔다. 졸업 후 곧바로 농장운영에 나섰지만 농사는 그리 만만치 않았다. 일년반만에 꿈을 접고 샐러리맨의 길로 들어섰다.

그를 만나자마자 왜 직장을 그만뒀는지부터 물었다. “직장생활에 회의를 느껴서”란 대답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지만 정반대였다.

그가 금호그룹에 입사한 것은 73년. 20여년간 앞만 보고 달렸다. 스스로 “임원 승진이 너무 빨랐다”고 할 만큼 성공적이었다. 요직이라 불리는 기획실장을 거쳐 이사에도 올랐다. 그는 직장생활이 재미있고 보람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런데 신나던 직장생활이 갑자기 재미없어졌단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데 이보다 더 간단하면서도 근원적인 이유가 있을까.

그가 마지막으로 맡은 일은 회장 비서실 이사였다. “남의 일정에 얽매이는 생활을 하다 보니까 좀이 쑤시더군요. 게다가 직장에서 웬만큼 성공했다고 생각하니까 더 이상의 의미를 찾기도 힘들었지요.” 그는 스스로 ‘너무 배가 불러서’ 직장을 그만뒀다고 말한다. 하지만 청춘을 다 바친 직장을 한순간에 박차고 나올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농사는 창조적인 직업〓 92년 5월 사표를 내고 바로 다음날 농장에 내려왔다. 부인은 서울에 남아 고교 2학년이던 딸이 대학에 갈 때까지 뒷바라지를 했다.

농사에 대해 그는 나름대로 철학을 가지고 있다.

“속이는 것이 없잖아요. 애쓴 것만큼 수확이 돌아옵니다”

“사회생활에서는 누가 어떤 것을 차지하면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잃어야 합니다. 제로섬(Zero Sum) 게임이지요. 하지만 농사는 그렇지 않아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면서 나만 열심히 하면 되지요.”

10년 가까이 농사를 지었지만 그는 아직도 식자(識者) 티가 난다. 인터넷 홈페이지도 만들었고 가끔씩 인터넷으로 바둑을 둔다. 틈나는 대로 책도 읽는다. 요즘 읽는 책은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그러나 책을 읽고 감상을 함께 이야기할 상대가 없으니 독서열이 식는단다.

“지적 자극이 없으니 게을러지더군요. 그게 다 촌놈이 되는 과정이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니 행복〓잘 나가던 직장생활과 좋은 배경(그의 아버지는 80년대 초 국무총리를 지낸 진의종씨)을 포기했지만 시골생활에 후회는 없다. 가끔 ‘이게 성공인가’ 자문하기도 하지만….

“가장 좋은 점은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겁니다. 언제 뭘 해야할지 자유롭게 계획을 짤 수 있지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은 노예와 다름없다고 생각해요.”

가끔 ‘정말 시간을 잘 썼는가, 더 치열하게 살 수도 있었는데…’라고 생각하면 슬그머니 후회가 되기도 한다. 시간이 탐나 농장에 왔으면서도 스스로 만족할 만큼 열심히 산 것 같지 않다고 반성하기도 한다. “지금보다 더 큰 인물이 될 줄 알았다”고 말하는 친지들도 부담스럽다.

그러나 기본적으론 이렇게 살아가는 방식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지금까지보다는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너도나도 농사 짓겠다고 하지만〓그가 스스로 밝히는 농장의 연간 매출 규모는 3억원. 그보단 좀 더 되겠다 싶기도 하지만 여하튼 농사는 수지가 잘 안맞는 사업이란 게 그의 주장이다.

“친구, 친지는 물론이고 생판 모르는 사람들도 농사를 짓겠다고 질문해 옵니다. 그러면 ‘이걸로 먹고 살려면 포기하라’고 얘기하지요. 농사 지어 수지타산 맞추기는 힘들어요. 지금 하우스에 있는 카네이션은 졸업·입학철과 어버이날을 겨냥해 재배하는 것들입니다. 평소 한 단에 3000원 하지만 대목엔 1만원까지 뛰어 짭짤한 재미를 보지요. 그렇지만 중국에서 수입한 꽃이 들어오면 하루 아침에 2000원까지 떨어져 버려요. 숫제 도박이지요.”

잘하건 잘못하건 농업 여건은 계속 나빠지고 있다. 그는 일종의 위기의식을 느낀다고 했다.

▽앞으로의 전략분야는 관광농원〓“취재 요청을 받고서 이런 걸 멋진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더군요.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니 멋진 것도 같고….”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원래는 관광농원을 할 생각으로 고향에 내려왔다”고 말을 꺼냈다. 10년 전에 10년 후를 내다보고 세운 계획이다. 관광농원 계획은 현재 주변지역 개발이 늦어져 생각만큼 잘 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기차역에까지 배웅나온 그는 작별인사를 하자마자 집으로 향했다.

“집에서 밥을 먹어야 집사람한테 점수를 따지”라며….

고창〓문권모기자 africa7@donga.com

◆ 진영호씨는

△1948년 서울 생

△경복 중·고등학교 졸업

△서울대 농대 농업경제학과 졸업

△금호그룹 테헤란지사, 일본지사 근무. 수출관리부장, 기획실장, 회장부속실 이사 역임.

△1992년 퇴직 후 학원농장 경영. 신지식인상, 새농민상, 대통령 표창 수상

△주소: 전북 고창군 공음면 선동 리 산 119-2

△농장 규모: 약 17만평

△주요작물: 보리, 콩, 화훼(카네 이션), 밤 대추 은행 등 과수

△관광농장과 진의종 전 국무총리 의 유품 및 부인 이학 여사의 자 수·서예작품을 소개하는 기념 관을 운영 중

△연락처: 063-564-9897

△홈페이지: http://soback.kor net.net/∼hakwon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