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어둠 속에 아주 조그만 틈이 보였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점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틈새로 뛰어들자 틈은 점점 커져 출구가 됐다. 작은 빛은 조금씩 밝아지더니 이젠 그를 휘감고 있다.꺼져가던 촛불은 어느덧 불꽃이 돼 다시 타오르고 있다.
“내가 갖고 있는 불씨를 사람들에게 준다는 것, 그건 희열이죠.”3년 전 마흔일곱에 다시 인생을 시작했던 이 남자는 그렇게 말한다.50을 앞둔 남자가 새로 출발해야 했을 때,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해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가까운 데 있어서 나 자신도 이 성공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요즘 기업체 연수원에서 최고 인기 강사로 떠오르고 있다는
그가 건넨 명함에는 ‘골프마케팅 시인 김광호’라고 적혀 있었다. 이 명함을 처음 받아본 사람이라면 두 가지 의문이 든다.
골프와 마케팅? 또, 시인은? 그는 기업체 연수원을 돌아다니며
‘골프와 경영’ ‘골프를 통해서 본 마케팅 전략’을 강의한다. 이를테면 골프에 빗대 경영전략과 자기관리 기법을 얘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정말 전하고 싶은 건 희망인지 모른다.
그의 얘기를 듣다보면 그가 정말 인생은 늘 새로 시작할 수 있다고 노래하는 ‘시인’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퍼팅하는 법, 그리고 인생에 도전하는 법#
‘어른이 되면서 골프는 아버지와 나 사이에 단순한 게임이 아닌 그 어떤 의미가 되었다. 말하자면 골프는 아버지의 고차원의 도덕세계로 들어가는 내 개인적인 입구가 되었다. 또 내가 어떤 인간이 돼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수단이 됐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와의 골프 여행을 그린 ‘마지막 라운드’에서 저자는 골프가 갖는 의미를 이렇게 적었다.
김광호씨에게 골프는 애초엔 보험 영업소장 시절 접대에 필요한 운동이나 취미였을 뿐이다. 그러나 드라이브를 배우고 퍼팅하는 법이 골프의 전부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가졌을 때 그는 자신에게 겸손해졌다.
“골프는 매 순간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승부란 생각이 들었어요. 무너지고 넘어져도 늘 도전할 때 새로운 라운드를 할 수 있다는 것, 그걸 배웠죠.”
#인생은 도전이다#
골프가 아닌 그의 인생의 도전은 예기치 않게,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찾아왔다.
99년 4월. 그는 ‘갑자기’ 실업자가 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 실업자를 자청했다. 회사(동아생명)가 어려워지면서 직원을 줄일 움직임을 보이자 그는 사표를 냈다. 부서장으로서 회사 사정에 최소한의 책임을 져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17년간의 직장생활을 청산한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6000만원의 퇴직금, 그리고 불안한 내일뿐이었다.
“내가 스스로 걸어나왔다”고 애써 자위했지만 이 나이에 뭘 할 수 있나 하는 두려움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철저하게 혼자가 됐다. 친구도 끊고 좋아하던 술도 끊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진지하게 얘기를 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게 뭔지를 생각해보자.”
어렴풋이 생각했던 골프를 활용한 마케팅 기법론. 늘 그의 머리 한편에 숙제처럼 남아있던 생각은 서서히 덩어리가 돼 그를 지배했다.
“그래, 여기에 승부를 걸어본다.”
‘은거’ 4개월만의 결단이었다. 신탁이라도 받은 것처럼 그는 전율했다. 방향이 잡혀지자 가속도가 붙었다. 그 가속은 저 밑바닥에서부터의 자신감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의 준비는 치밀했다. 골프 승부의 출발점은 코스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린의 잔디를 만져보듯 그는 자신이 새로 뛰어들 시장을 탐색하고 자신을 몰아붙였다.
미뤄뒀던 운전면허도 따고 인터넷에도 입문했다.
“연극단 견습생 생활도 했어요. 대중 앞에 서는 훈련을 하기엔 연극 연습이 제격이라고 봤죠.”
50줄을 바라보는 남자가 워크샵 단원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하자 극단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는 오히려 돈을 줘가면서 무대 훈련을 했다. 대학 4학년짜리 ‘선배’가 시키는 원산폭격 기합도 받아가면서.
“연극의 격언 중에 ‘등을 보이면 죽는다’는 말이 있더군요. 제 처지를 설명해주는 말이었어요”
#실패를 두려워말라#
등을 보이지 않고 그는 앞을 향해 돌진했다. 99년 10월 그의 ‘데뷔’는 그의 좌우명처럼 실패를 각오한 시도였다.
한 외국계 생명보험회사에 사원 교육 강의를 하고 싶다고 하자 상대방은 그의 이력서부터 훑어봤다.
“국내기업에서 잘린 사람이 외국 기업에서 무슨 강의냐라며 한마디로 거절하더군요. 그렇지만 두드리고 또 두드렸죠.”
‘돈을 받지 않고 해보겠으니 냉정 공정하게 평가해달라’고 하자 그제서야 문을 열어줬다. 2시간의 강의 내내 그는 청중을 사로잡았다. 받아든 돈은 없었지만 그건 새로운 ‘라운딩’의 시작을 의미했다. ‘골프마케팅 시인’은 이렇게 태어났다.
#생애 최고의 날#
작년 12월 10일은 그의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그날 그는 모교(이리 남성고) 후배들 앞에 섰다. 수능시험을 마친 3학년 앞에서 ‘자랑스러운 선배의 인생담’을 들려주는 자리였다.
전날밤 동창들이 그를 술집으로 불러내 축하연을 가졌다. 이른바 ‘범생’이 아니었던 그의 고교시절을 기억하는 친구들의 반응은 축하 이전에 경악이었다.
“무기정학 2번에 유기정학 5번. 가출과 싸움질밖엔 한 게 없었던 놈이 후배들에게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고 얘기하게 됐으니 그럴만도 하죠.”
그의 수첩을 들여다보니 한 달간의 일정이 빡빡하다. 최고 수준의 강의료를 줘야 하는 그를 모시려고 많은 기업들이 줄을 서 있다.
“돈보다도 청중과의 교감을 느끼는 게 좋습니다. 특히 제 얘기를 듣는 중년세대를 조금이라도 일으킬 수 있다면요.”
이렇게 말하는 이 남자는 분명 ‘자랑스런 선배’의 자격이 있어 보였다.
이명재기자 mjlee@donga.com